노조·이익단체 우격다짐에 정부 정책 끌려다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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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이익단체 등의 반발에 정부 정책이 표류하고 있다.

특히 이같은 현상이 정권 말기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고착·관행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말 조흥은행 노조가 매각에 반대하며 자기 은행의 주요 자료를 불법적으로 탈취한 지 한달이 다 돼 가지만, 정작 조흥은행 대주주인 정부는 이렇다 할 대응을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당초 이달 안에 실사를 마무리하고 공적자금관리위원회에서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예정이었던 조흥은행 매각 일정은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조흥은행 노조 측은 "민영화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졸속 매각에 반대하는 것"이라며 "은행 대출자료 원본을 갖고 있으며, 매각 반대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강경 조치를 취할 경우 상황이 더 악화될 우려가 있어 일단 지켜보고 있다"며 "실사는 급한 대로 남은 자료를 갖고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경부 내에서조차 "노조가 위법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적당히 달래는 식으로 대응한다면 앞으로 나쁜 선례가 되고, 대외 신인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 폴 그룬왈드 한국사무소장은 지난 21일 기자회견에서 "국내외 투자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지금이 조흥은행 매각의 좋은 기회며 이같은 관심이 내년에도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다"고 밝혔다.

전기요금 개편과 관련, 산업자원부는 원가분석 결과를 토대로 단계적으로 가정용·일반용 전기요금을 내리되 산업용은 올리는 방안을 정해 놓고도 재계의 반발을 우려해 시행을 미루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는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 부담을 늘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한 반대 의사를 정부에 전달했다.

산자부 관계자는 "실무급에선 재경부와 전기요금 개편안에 대해 협의를 마쳤지만 재계의 반발을 의식, 아직도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농업용 전기요금도 원가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어 올리는 게 맞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지만 농민단체의 반발을 우려해 산자부는 아예 개편안의 협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로 했다.

외국인학교·자립형 사립고 등을 대폭 늘리자는 재경부의 건의에 대해서도 교육부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전교조 등의 반대 의견이 있는 만큼 신중하게 결정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최근 논란이 되는 경유승용차 도입을 놓고 자동차 업계와 환경단체의 입장이 엇갈리자 산자부·환경부 등도 결론을 못내린 채 혼선을 빚고 있다.

성균관대 김준영 교수는 "정부가 이익집단에 끌려다니면 기본적인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다시 질서를 찾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며 "정부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고현곤·정철근 기자

hkk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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