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하달 → 난상토론 회의문화 가 바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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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1면

직장의 회의 문화가 바뀌고 있다. 회의 주재자가 일방적으로 의견이나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상명 하달식'회의나, 토론은 했지만 아무 결론도 내지 못하는 '시간 때우기'식의 회의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대신 형식이나 장소 등에 얽매이지 않고, 직급이나 연차의 구분 없이 회의 참가자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난상토론식 스타일이 급부상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에 진출한 외국기업들이 늘어나면서 목적이 뚜렷하고 합리적인 서구 기업들의 경영 문화가 급속히 확산한 결과다. 여기에 인터넷 등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도 한몫을 했다.

회의의 틀을 바꾸는 대기업=삼성 에버랜드는 지난 6월부터 50개에 달하는 사내 회의실을 '토론방'이란 이름으로 바꿨다. 회의에 갖고 들어오던 각종 자료들도 간소화했다.

평소 부하 직원들이 만들어주던 발표 자료는 발표자가 직접 정리토록 했다.

이 회사 경영지원 유닛장인 피재만 상무는 "상의하달식 회의문화로는 이제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회의 문화를 뜯어고쳤다"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식에서 결론이 날 때까지 계속하는 방식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SK그룹도 좁은 회의실이나 사무실을 아예 벗어나 외부 장소에 모여 부서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캔미팅(Can meeting)'제도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캔미팅의 운영 원칙은 두 가지. 최종 의사 결정권을 갖고 있는 부서장이 반드시 참석해야 하며, 쓸데없는 대화만 하지 않도록 사전에 미리 토론할 주제를 정해 간다는 것.

SK텔레콤 마케팅팀 이주영씨는 "미팅을 통해 팀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고 나면 마치 한 식구처럼 느껴진다"며 "무엇보다 주인 의식을 느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외국기업 다양한 회의 문화=대다수 국내 회사원들이 회의하면 으레 엄숙한 분위기나 딱딱한 주제라는 고정 관념을 갖고 있는데 반해 외국기업들의 회의 문화는 다양하다. 한국컴퓨터어소시에이트(CA)는 소속 부서와는 별도로 필요에 따라 소집되는 커미티 회의가 수시로 열린다. 커미티 모임의 주제도 다양하다.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 커미티, 직원 사기진작 방안 모색 커미티….

회사 관계자는 "직위에 상관없이 임직원 중 한명이 의장 역할을 하며 팀원들을 이끈다"고 설명했다.

모토로라코리아는 해마다 서너 차례 전직원이 한자리에 모여 '타운홀 미팅'을 연다.

사장을 비롯한 임원진이 직원들과 회사의 경영 사항에 대해 솔직하게 토론하고 자유로이 질의 응답하는 시간을 갖는다.

회의실을 개조해 생산성을 높이려는 곳도 있다. 한국 네슬레는 지난해 11월 서울 청담동 사무실로 확장 이전하면서 여섯 개의 회의실 이름을 각각 테이스터스 초이스·네스카페·네스티·네스퀵 등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 이름으로 바꿨다. 회의실 장식도 브랜드 컨셉트에 맞게 디자인했다.

마케팅팀 신주혜 대리는 "브랜드 회의실로 바뀐 이후에 회의 진행도 훨씬 부드럽고, 브랜드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커지는 것 같다"며 "직원들이 내놓는 아이디어도 더 참신해졌다"고 말했다.

영국계 담배회사인 BAT코리아 역시 회사에서 만든 켄트룸·휘네스룸·던힐룸 등 상품명을 그대로 따 회의실 이름을 붙였다.

그래도 아직 멀었다=이같은 변화 조짐이 서서서 나타나곤 있지만 아직도 상당수 기업의 회의 문화는 권위적·일방적이다. B사 기획팀의 李모(35) 차장은 "평소 회의에서 활발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자는 말들를 흔히 하지만 실제로는 회의를 주재하는 임원 외에 이야기를 하거나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S사 마케팅팀 崔모 부장은 "의견을 내는 부하 직원들이 많지 않아 회사 방침을 전달하는 자리가 되고 만다"고 말했다.

표재용 기자

pjyg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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