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고요한 眞景의 진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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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은 전통 화단과 근대를 이었던 산수화가였다. 스승인 심전 안중식(1861~1919)의 양식을 충실히 따랐던 초기 시절로부터 후일 자기 고유의 독특한 양식을 이룩하기까지, 그가 내처 그리고 또 그렸던 것은 삼삼한 한국의 시골 풍경이었다.

6일부터 10월 6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청전 이상범의 진경산수'는 그의 30주기 기념전이다. 1961년 반도화랑 시절에 그림 심부름을 하며 청전의 말년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명자(59) 갤러리 현대 대표가 고인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전시회를 마련했다. 19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미공개작 30점을 포함해 모두 50여점이 소장가들로부터 나왔다. 8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연 10주기 기념특별전 뒤 20년 만에 개최되는 청전의 큰 전시인 셈이다.

청전은 옆으로 길게 퍼지는 수평 구도를 즐겼다. 노년기 산세의 완만한 곡선이 죽 펼쳐진 화면을 따라가는 시선은 보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성기고 빽빽한 이완과 긴장이 잘 엮어진 그의 독특한 준법은 끊어진 띠를 닮은 전통적인 절대준(折帶?)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라 짐작된다. 청전만의 그 독특한 필치가 자아내는 진동감이 그림 속 자연을 살아숨쉬게 만든다. 하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촌부에게서 시골 생활의 생생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쉽다.

청전은 심전 안중식 밑에서 공부했던 화가들 중 심산 노수현(1899~1978)과 함께 총애를 받았던 제자였다. 심전(心田)은 이 두 사람에게 자신의 아호에서 한 자씩 떼어 이상범에게는 청전(靑田), 노수현에게는 심산(心汕)이라는 호를 내렸다. 이들은 청전이 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직할 때까지 동아일보사에서 미술기자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이란 일제강점기이던 36년 8월 25일,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해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가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있는 것에 분개해 청전이 일장기를 지워버린 일이다. 청전의 아들인 화가 이건걸(69·상명여대 명예교수)씨 회고에 따르면, 당시 체육기자이던 이길용이 사진 필름을 들고와 "청전, 이거 어떻게 안될까"라고 넌지시 부탁하자 청전이 호분으로 일장기를 지운 뒤 그 필름으로 사진을 인화했다고 한다. 청전은 이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끌려가 40일을 구금당하며 고초를 겪은 뒤 요시찰 인물이 되는 일종의 필화를 겪었다. 입장료 어른 3천원, 학생 2천원. 02-734-611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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