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13. 극장 방화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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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1989년 서울 동숭동 문예회관 앞에서 미국 UIP의 한국 진출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영화인들. [중앙포토]

돌이켜보면 극장에 뱀을 푼 것은 비신사적인 행위였다. 다행히 투입된 뱀들이 맥을 못 추고 금방 죽어버렸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다치거나 재산상 피해를 보았다면 큰 불상사로 번질 뻔 했다. 어찌 보면 유치하지만 애교로 봐 줄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의 관련자들이 훈방으로 풀려났을 것이다.

그런데 한참 뒤 서울 강남의 시네하우스 극장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으로 분위기가 급격히 반전돼 버렸다. 관객이 없는 새벽녘이어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누군가 고의로 불을 질렀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지탄받을 수밖에 없는 소행이었다. 그 극장은 미국 직배 영화인 '위험한 정사'를 상영했던 곳 중 하나였기 때문에 경찰은 당연히 우리를 용의선상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샅샅이 조사해도 혐의를 밝혀내지 못하자 경찰은 '뱀 사건'을 다시 문제 삼아 그때 관련자들을 구속해 버렸다. 결국 정지영.정회철 감독과 정회철 감독을 도와 뱀을 극장에 직접 풀었던 이들은 1~2년씩의 징역형을 살거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미궁으로 빠지는 듯했던 방화 사건은 몇 달 뒤 경찰이 당시 영화인협회장이었던 유동훈씨와 이일목 감독 등 세 명을 구속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우리와는 아무런 상의없이 독자적으로 일을 저지른 이들은 "직배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을 응징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약 7년 뒤인 1996년 이들 중 한 명이 '양심선언'을 하면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극장 사이의 알력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었던 것이다. 일부 극장주가 겉으로는 직배 영화를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막후에서는 '어떻게 하면 미국영화를 배급받아 자기네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을까'하고 골몰했던 셈이다.

나도 의정부와 성남 등에 영화관을 가진 극장주였지만 이런 행태를 보고는 몹시 서운했다. 나라고 무슨 배짱이 두둑하다고 눈앞의 이익에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미국영화의 '융단폭격'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는 일단 한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정사'에 이어 90년엔 '사랑과 영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미국영화 직배 시스템은 한국 영화시장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고사(枯死)할 것 같았던 한국영화는 몇 년 전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누를 정도로 기세가 높아졌다. 나는 한국영화가 이런 힘을 갖추게 된 출발점이 미국영화 직배 저지 투쟁에 있다고 본다. 당시 영화학과 학생들을 비롯해 그 싸움에 동참했던 이들이 영화 현장의 각 분야에 진출하면서 한국영화의 '허리'가 튼튼해진 것이다.

편당 관객 1000만명 시대에 이른 한국영화의 영광은 이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와 직접 관련이 없으면서도 영화인들의 충정에 감동해 자발적으로 극장에 뱀을 풀고 징역까지 살았던 그 무명의 관객에게도 고마움을 나타내야 하리라.

당시 직배 저지에 나섰던 젊은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제(한국영화 의무상영제) 사수 쪽으로 운동 방향을 틀어 오늘까지 잘 해오고 있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의 양기환 사무처장을 비롯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이들의 공이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데 또 다시 스크린쿼터제가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한국영화의 운명은 우리 영화인들이 어떻게 단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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