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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조선독립’ 부르짖다 만고역적으로 전락한 이완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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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나라를 팔아 권력의 위세를 떨친 이완용(李完用, 1858~1926)과 그의 자손. 대한제국의 총리대신 직을 버리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대훈위 후작 이공지구(李公之柩)’라 쓰인 명정(銘旌)을 자랑스럽게 관에 덮고 흙으로 돌아간 그는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더러운 이름을 남겼다.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천인공노할 친일 매국노이자 민족반역자로 손가락질 당하는 이완용. 그러나 그가 갑신정변 이후 거세어진 청국의 간섭에 맞서 대미 자주외교를 펼친 반청 친미 개화파였으며,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강박에 맞서 아관파천을 일으킨 반일세력이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특히 그가 독립협회 회장으로 독립문 정초식 때 한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연설은 상식에 반하다.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나,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폴란드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렸다.”(독립신문, 1896. 11. 24) 그때 그는 조선이 독립을 달성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를 만들 것을 외친 애국적 개화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외국공사의 이권 요구에 맞서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나라 위해 옳은 일을 할 양으로 외국공사의 책망과 외부(外部) 안에 있는 대신들의 성냄을 받아가면서도 대한 인민을 위해 주지 못하겠다고 정정당당히 말”했던 강골이었다. 이러한 반러적 태도로 인해 그는 권좌에서 밀려났다.

“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성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윤치호일기’, 1896. 1. 21) 그가 내면 깊숙이 감춰 둔 검은 마음을 꿰뚫어 본 윤치호의 혜안은 적중했다. 1905년 9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학부대신으로 정계에 다시 돌아온 그는 본색을 드러냈다. 두 달 뒤 그는 ‘을사오적’의 수괴 노릇을 해 나라의 외교권을 넘긴 대가로 총리대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1907년 사법권과 경찰권의 이양과 군대 해산을 규정한 ‘정미7조약’을 맺는 등 일제의 주구(走狗) 노릇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909년 12월 후안무치한 친일 행각을 응징하는 이재명 의사의 칼도 그의 질긴 명줄을 끊지 못했다. 이듬해 6월 30일 총리대신에 복직한 그는 8월 22일 나라를 송두리째 일제에 넘겼다.

그러나 이완용의 이중성을 비난한 윤치호도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오늘 우리가 그를 단죄하는 것만으로 망국의 책임을 면하려 한다면 그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것에 진배없다. 다시 돌아온 열강 쟁패의 시대를 맞아 한 세기 전 참담한 실패의 역사에 대한 우리 몫의 책임 찾기가 더없이 필요한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