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아직도 민생대책회의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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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생'을 내세운 정부의 시장 개입이 잦아지고, 강해지고 있다. 모든 정책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백성을 잘 살게 하자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쏟아놓고 있는 민생 관련 대책들은 행정력이나 재정자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어서 자칫 부작용을 낳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16일 대통령이 주재한 민생 관련 장관회의에서 제시된 대책들이 좋은 예다. 이날 회의는 지난 14일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밝힌 4대 국정 과제 가운데 하나인 '중산층과 서민생활의 향상' 부분의 후속조치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시된 대책들은 물가와 주택시장 안정대책, 복지행정 및 청소년 실업대책에 집중됐다.

물가 부문에서는 올해 3%대 물가 안정을 위해 공공요금을 안정시키고 농산물과 주요 원자재의 비축을 늘려 수급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물가 불안 심리를 잠재울 수 있는 현장감시를 강화한다는 대책이 발표됐다.

최근 서울 강남 지역의 집값 급등으로 표면화한 주택시장 안정을 위해 상반기 중에 일반 임대주택 및 소형주택 26만가구와 공공 임대주택 4만가구 등 30만가구를 건설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를 확대하고 생계비 지원금을 인상하며, 청소년 실업 해소를 위해 1분기 중에 관련 예산의 40%를 조기 집행한다는 발표도 있었다.

이런 대책들은 지난해 하반기 이후 뚜렷이 악화되거나 새로 부각된 문제들을 추려 현실적인 대응 방안들을 마련한 것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만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 실제로 강조된 부분은 행정력을 앞세운 단속의지였다. 시.군 등 지방자치단체들이 책임지고 관내에서 서비스 요금이 들먹이지 않도록 현장 중심의 감시활동을 벌인다는 품목별.지역별 책임관리제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식의 지역 할당식 책임관리제는 물가를 행정력으로 잡겠다는 과거형 발상이며, 실효성도 의심스러운 정책이다.

신학기 납입금과 학원비를 많이 올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대학 총학장 회의나 교육감 회의를 열고 학원비 실태를 현장 점검한다는 방안도 유사한 발상이다. 주택시장 과열을 막기 위해 합동대책반을 만들어 시장 동향을 상시 점검한다거나 세무조사를 실시하겠다는 대책 역시 1970년대부터 다반사로 동원해왔던 방식이다.

문제가 터지고 대책은 만들어야 하는데 동원할 방안은 갈수록 줄어드는 정부의 고민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다급하다고 근본적인 처방 대신 행정력으로 시장을 억누르는 식의 발상은 결국 시장을 왜곡해 국민 경제에 더 큰 어려움을 가져오게 할 것이다.

정부 스스로가 올해 경제운용계획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원칙과 정도(正道)'를 제시한 바 있다. 권위주의 시대 정권의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연상시키는 이런 유의 민생 대책회의는 이제 지양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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