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실패작 예산심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내년도 국가예산이 진통 끝에 합의됐다. 여야는 예결위를 거쳐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에서 6천33억원을 순삭감한 1백11조9천8백억원 규모의 2002년 예산을 확정했다.

여야 모두 막판까지 세입.세출예산의 폭과 내용을 놓고 다분히 정치적인 공방을 주고받았지만,올해 국회의 예산심의는 내용과 절차 양면에서 실패작이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렵다. 심의 결과는 빈약하며, 절차 역시 부실의 연속이었다.

심의 결과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삭감폭이나 내용이 기대에 훨씬 못미친다는 점이다. 애당초 증액을 주장했던 여당에는 크게 기대할 것이 없었다 치자. 그러나 당초 10조원이니,5조원이니 하는 삭감폭을 장담했던 거대 야당 한나라당의 책임은 피할 수 없다.

6천억원이라는 삭감폭(예산안 대비 0.5%)은 지난해(8천억원)수준에도 못미치며, 야당의 예산심의에 걸었던 국민의 기대에도 훨씬 못미치는 것이다. 야당은 그간 성역시되던 국가정보원 예산이나 남북협력기금에 처음으로 손을 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고작 1백80억원에 불과한 삭감 규모로 얼마나 후한 점수를 받을지 의문이다.

세출예산의 3분의2(65.5%)에 달하는 인건비.국방비.교부금 등 경직성 경비를 제대로 심의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올해(16.5%)에 이어 내년에도 9.9% 증액된 인건비 등 대부분의 경직성 예산이 거의 정부 원안대로 받아들여졌다.

삭감된 세출예산의 대부분은 공적자금 이자와 예비비 등 어차피 내년에 경기가 좋지 않으면 추경(追更)재원으로 쓰일 항목들이 차지하고 있다. 세입 쪽에서도 법인세 인하문제를 놓고 여야가 끝까지 정치적인 공방에 집착해 예산심의의 격을 떨어뜨렸다.

이같은 결과는 부실한 예산심의 과정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미국 테러사태 직후인 지난 9월 하순에 정부가 예산안을 제출할 때만 해도 여야 모두 정기국회 회기 내 처리를 약속했다. 테러 여파에 따른 경기대책의 성격이 강조된 내년 예산안의 중요성을 입을 모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사뭇 달랐다. 법정기한(12월 2일)을 훌쩍 넘기고도 계수조정소위조차 구성하지 못하다가 임시국회를 열어 열흘 만에 심의를 끝내버렸다.

초읽기에 몰려 여야가 예산 주고받기를 하던 막판 1주일 동안 지난해부터 예산심의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심의과정을 공개하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나마 절차의 투명성조차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예산심의는 국회의 가장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다. 선진국을 따라잡는 지름길이 철저한 예산.결산심의에 있다는 점은 정당 스스로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마다 부실심의는 되풀이되고 있다. 예산심의 강화를 내세워 올해부터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상설화한 국회의 다짐을 되살려야 할 시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