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고이즈미 방한 왜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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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가 취임 후 처음으로 어제 한국을 다녀갔다. 7시간30분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일제 강압통치의 상징인 서대문 독립공원을 돌아봤고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과 사과의 마음을 표시했다.

또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만나 역사교과서와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꽁치 조업 문제 등 현안에 대해서도 나름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전광석화(電光石火)를 방불케 한 그의 방한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로 양국간 근린관계를 복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던 우리의 기대에는 못미쳤다. 정부가 왜 그의 방한을 수락했는지 국민으로선 납득하기 어렵다.

일본이 진일보한 입장을 보이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방한 요청을 수락했다는 것이 정부측 설명이었지만 어제 고이즈미 총리가 표명한 역사인식은 1998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의 발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죄(謝罪)'라는 명확한 일본어 표현을 두고 '오와비(おわび)'라는 애매한 표현을 고집한 것도 여전하다.

표현이야 외교적 수사니까 그렇다 쳐도 역사교과서와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대해서도 모호한 해법으로 핵심을 비켜간 것은 유감이다. 역사공동연구기구를 설치하고, 누구라도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지만 그것이 과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당장 발등의 불로 떨어진 꽁치 조업 문제의 경우 고위급 회담을 통해 논의키로 합의했는데 지금까지 그런 협상채널이 없어서 문제가 불거진 건 아니다.

그래서 고이즈미 총리는 반(反)테러전쟁이라는 새로운 국제상황을 이용해 취임 이후 줄곧 자신의 발목을 잡아온 근린외교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자위대 해외파병을 기정사실화하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효과를 노리고 한국과 중국 방문을 서둘러 기획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는 것이다.

내년이면 두 나라는 월드컵 대회를 함께 치러야 한다. 또 외교관계의 부침(浮沈)에 관계없이 양국간 경제적 협력과 민간 차원의 교류가 중단되거나 위축돼서는 안된다. 한.일 양국 사이에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이 중요하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사 문제로 양국관계 발전에 제동이 걸리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서대문 독립공원 방명록에 '사무사(思無邪)'라고 썼다. 정확한 역사인식을 토대로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을 바란다는 그의 말이 사특함 없는 진심이라는 걸 고이즈미 총리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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