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개혁과 이기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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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나라는 특히 1980년대 말의 민주화 이후 경제.사회적으로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됐는데 국민은 지역.계층.집단별로 분열돼 서로 대치해 왔다. 그 결과 문제들이 쌓이고 경제와 사회는 각종 방만성과 경직성으로 고비용 저효율화되도록 방치되고 있었다.

***사회 합의없이 밀어붙여

이에 따라 우리 경제는 심한 동맥경화증을 앓게 됐고, 외환위기는 그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외환위기는 고비용 저효율의 여러 구조적 원인을 치유하기 위한 각종 경제개혁을 취하게 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해줬다. 상황이 매우 급박한 만큼 국민이 과감하고 고통스러운 개혁조치들을 일단 수용해 준 것이다. 그 결과 정부는 외환위기 발생 2년 만에 외환위기의 극복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려움은 정작 이때부터 시작되다시피 했다. 외환위기는 비교적 신속하게 극복할 수 있었으나 고비용 저효율을 초래하는 각종 구조적 문제의 극복은 원래 시일을 소모하는 과제였던 만큼 외환위기 극복 이후에도 계속 추진돼야만 했다.

그러나 위기감이 일단 가시면서 개혁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개혁 드라이브가 그 추진력을 크게 상실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실 대기업과 부실채권의 처리, 재벌개혁, 정부 자체의 구조조정, 공기업 민영화 등이 이해 관계자들의 저항으로 지체되고 있다. 의료개혁은 엄청난 혼란과 국민의 반발을 초래했고, 교육개혁도 일대 실정(失政)으로 평가되고 있다. 언론개혁도 심각한 후유증의 단초를 안고 있다. 혼란과 반발이 개혁의 실효성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개혁의 부진함 및 개혁으로 인한 부작용은 과거의 정권 아래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곤 했다. 그 원인으로 우리는 정부와 정치권의 잘못, 나아가서는 리더십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개혁 과정에서 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을 도외시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밀어붙이기식 추진에 있다고 하겠다.

역대 정부는 제반 개혁을 이들이 국민 다수에게 이득을 가져오기 때문에 추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적지 않은 소수에게는 손실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들 소수의 저항을 무시해선 안되는 것이었다. 여러 개혁이 레스터 서로 교수가 말하는 제로섬(零合)게임으로 추진됐던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공동 번영을 전제로 하는 국민간의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고 따라서 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불가능하게 한다. 서로 교수에 따르면 제로섬 게임은 동물들간의 영토 싸움과 유사하다. 남의 영토를 빼앗고자 하는 침입자는 방어자를 이기려면 방어자에 비해 그 힘이 두배는 돼야 한다. 손실을 보는 쪽의 저항이 이처럼 완강한 것이다. 이른바 집단이기주의의 힘도 여기에서 나올 것이다.

***성과배분 메커니즘 필요

그러나 제반 개혁이 반드시 제로섬 게임인 것은 아니다. 다수의 이득이 소수의 손실보다 크고 또 공정한 성과배분 내지 손실보상의 원칙이 작용하는 한 개혁은 플러스섬 게임인 것이며, 더욱 한국과 같은 고성장 경제 아래에서는 성공적인 개혁의 성과로 이와 같은 결과가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 상시적.효과적으로 여러 개혁을 추진해 나가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선 국민에게 공동 번영의 장기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공동체 의식을 조성해야 한다. 동시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양대 원칙으로 하는 공정하고 효율적인 성과배분 메커니즘을 제도화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 조건이 성립할 때 국민은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토크빌이 말한 바와 같은 '계몽된 이기주의' 에 입각해 제반 개혁과 이를 위한 사회적 합의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양수길 세계경제연구원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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