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법원장, “법원 비판 예의 갖춰 해야”…오바마에 반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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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대법원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상황·분위기·예의의 문제도 있다.”

존 로버츠 미국 대법원장이 9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겨냥해 쓴소리를 했다. 지난 1월 오바마가 의회 신년 국정연설 때 대법원을 비난한 데 대해 뒤늦게 반격한 것이다. 오바마는 당시 대법원장과 5명의 대법관이 맨 앞줄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선거광고를 허용한 대법원 판결을 거세게 성토했다.

워싱턴 포스트 등 미 언론은 로버츠 대법원장의 반격으로 행정부와 사법부 간 2차 충돌이 본격화됐다고 전했다.

◆“국정연설에 대법관 참석 의문”=로버츠 대법원장의 발언은 앨라배마대 법대 강연에서 나왔다. 법대 학생들을 상대로 대법원의 역사에 대해 강연한 그는 문답 시간을 통해 오바마 발언과 행태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로버츠는 “정부를 구성하는 한 축의 사람들이 대법원을 빙 둘러싼 형태로 기립해 환호하는 가운데 사법부 인사들이 의전에 따라 무표정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국정연설 장면은 매우 우려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의회에서 이뤄지는 대통령 국정연설은 이미 정치적 찬양집회로 변질됐다”며 “과연 대법관들이 거기에 참석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언급했다.

오바마의 국정연설 당시 보수성향의 새뮤얼 앨리토 대법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언의 반박을 했다. 이후 또 다른 보수성향의 클라렌스 토머스, 안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은 “매우 당파적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는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앞으론 참석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의 전임자인 데이비드 수터 전 대법관은 “대법관이 왜 대통령 국정연설의 들러리가 돼야 하느냐”며 재임 중 한 번도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로버츠 대법원장의 비판은 훨씬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었다. 그런 만큼 미 정가에선 두 헌법기관의 대립이 장기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실제로 백악관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로버츠 대법원장의 발언이 알려진 뒤 로버트 깁스 백악관 대변인은 “대법원장의 개인적 의견에 대해서가 아니라 대법원의 판결에 초점을 맞추겠다”며 대법원 판결을 다시 한번 비판했다. 그는 “정말로 우려스러운 것은 대법원 판결로 기업과 이해집단의 자금이 선거판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된 점”이라고 반박했다.

◆하버드 동문의 악연=로버츠와 오바마 두 사람은 하버드대 법대 동문이지만 이념적 지향점이 달라 불편한 관계를 이어왔다.

오바마는 상원의원이던 2005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로버츠 대법원장 후보(당시 50세) 인준표결에서 반대했다. 그는 “로버츠 후보가 대법원장으로서 갖춰야 할 지적 능력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면서도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가치관과 시야, 감정 개입의 정도인데 로버츠 후보는 약한 자보다 강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왔다”고 반대했다.

워싱턴=최상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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