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얼었어요" 철원은 지금 냉동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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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5일 오후 3시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지경리 43번국도변 주택가는 '유령의 도시' 를 연상케 했다.

평소 같으면 군부대 면회객.관광객.주민들로 북적거리던 중심가에서도 사람들을 보기 어려웠다.

음식점.정육점.슈퍼 등도 손님이 없어 썰렁하고, 빙판으로 변한 왕복 2차로 도로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차량이 간간이 눈에 띌 뿐이었다.

이날 오전 8시18분 이곳에서 기상관측이 실시된 1987년 이래 가장 추운 영하 27.8도를 기록하는 등 영하 20도 내외의 강추위가 닷새째 계속되면서 철원은 온통 '동토(凍土)의 도시' 로 변해 있었다.

"잠시라도 밖으로 나가면 금방 동상에 걸릴 것 같은데 어디 꼼짝이나 하겠어요. 이런 추위는 평생 처음입니다."

주민 박광석(朴光錫.41.자영업)씨는 "그래도 오늘은 바람이 적은 편" 이라며 "낮 최고기온이 영하 15도 안팎인 상황에서 바람마저 세게 불면 살갗이 찢어질 것 같다" 고 말했다.

혹한 속에서 이날 음료수와 맥주병이 얼어 터지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갈말읍 문혜리 주류.음료수 도매업체인 철원상사 창고에 보관 중이던 맥주와 사이다 7백여병이 얼어 이중 2백여병은 깨졌다.

창고 관리인 김종욱(金鐘旭.58)씨는 "오늘 오전 8시쯤 사이다를 트럭에 싣기 위해 창고 문을 열고 작업을 시작한지 불과 20여분 만에 사이다와 맥주병이 잇따라 얼어터지기 시작했다" 고 말했다.

주민들이 추위에 갇히다 보니 음식점 등은 매출이 크게 줄었다. 갈말읍 신철원리 한양가든은 하루 70만~8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으나 추위가 닥치면서 30만원 내외로 뚝 떨어졌다.

반면 LPG나 경유차의 연료관이 얼어붙으면서 카센터와 견인업체.자동차공업사들은 짭짤한 특수를 누렸다.

갈말읍 군탄리 '신철원공업사' 는 이날 오전에만 평소의 두배가 훨씬 넘는 30여대의 차량을 견인해 오거나 출장 수리했다.

이렇다 보니 요즘 철원군 읍내 거리는 오후 8시가 통금 시각이다. 일부 상점들은 날이 저물면 일찌감치 셔터문을 내린다.

추위는 주민들만 움츠러들게 한 것이 아니다. 추운 지방에서 날아온 철새들도 몸놀림이 둔해졌다. 민통선 북방지역 기러기의 경우 평소엔 먼발치에서 인기척만 있어도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지만 추위가 닥치자 주민들이 바로 옆까지 다가가야 폴짝 뛰어올라 약간 자리를 옮길 뿐 날아가지 않는다.

철원〓이찬호.전익진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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