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냄비 기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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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대 초의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위컴 대장이 사석에서 한국인의 국민성을 들쥐에 비유해 말썽을 빚은 일이 있다.

시류와 유행을 쫓아 앞뒤 안가리고 몰려가는 꼴이 들쥐와 닮았다는 망언(妄言)이었다. 여론이 냄비 끓듯 하면서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했다.

'냄비 기질' 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하필 들쥐와 비교해 모욕감을 유발하느냐는 항의가 많았다.

이번엔 냄비 근성이야말로 한국의 성공 열쇠라고 주장하는 책을 미국인이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의 '나는 한국이 두렵다' (중앙M&B)는 책이다.

그는 "흔히 '한국병' 으로 불리는 급한 성격이 한국의 정보화를 앞당기는 밑거름" 이라고 지적한다.

20년 전 비하의 상징이었던 냄비 기질이 지금은 찬사의 대상으로 돌변했으니 역시 세상만사 시간 문제고 보기 나름인가.

존스 회장의 '상상력' 은 알아줄 만하다. 미국은 1차세계대전 이후 40년마다 외부의 도전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왔는데 그 주기로 볼 때 차기 도전자는 한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삭막한 사이버 세상에 인정(人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자가 앞으로 인터넷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으로 내다본다. 그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인터넷 세계의 주인이 돼 있을 2025년께면 미국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로 한국이 떠오른다는 시나리오다.

어차피 장님 코끼리 만지고 하는 얘기 아니냐고 웃어 넘길 수도 있지만 우리 뜻과 상관없이 지옥과 천국 사이를 오가는 기분이어서 유쾌하지만은 않다.

며칠 전 증권거래소가 세계 주요국 50개 증시의 지수등락률을 조사했더니 올들어 코스닥지수의 하락률이 61.66%로 1위였다고 한다.

지난해 코스닥지수는 2백40.7%가 치솟아 세계 신생증시 가운데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올라갈 때도 최고, 떨어질 때도 최고니 발갛게 달아올랐다 싸늘히 식어버리는 냄비가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든다.

벤처는 어느 민족보다 한민족에게 잘 어울리는 기업형태라는 분석도 있다.

'빨리빨리' 문화와 냄비 기질이 신속성.지속적 변화.가치지향.불확실성의 극복 등 벤처의 성공요인과 딱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같은 풀뿌리도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된다. 냄비 기질의 부정적 측면은 줄이면서 긍정적 측면은 살리는 지혜가 아쉬울 뿐이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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