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한인 노숙자]“자식에 이런 모습 보이기 죽기보다 싫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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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4개월간의 노숙자 생활을 마친 박태영씨가 새로 마련한 아파트에서 세인트제임스 성공회 교회 김요한(왼쪽) 신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김상진 기자>

하루아침에 파산하고 혼자되기로 마음먹어 아내와 강제로 이혼…처마있는 곳은 명당, 이미 '선배들의 자리. 아무데서 자다간 싸움. 교회에서 무료 배급, 3일만에 음식 먹어봐 "창피한게 어디 있어요"

26일 LA한인타운 내 한 아파트. 이날은 박태영(가명ㆍ55)씨에게 특별한 날이다. 110일간의 홈리스 생활에서 벗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세인트제임스 성공회 교회의 김요한 신부의 도움으로 방 한칸을 장만한 박씨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제가 홈리스가 될 줄 꿈에라도 생각했겠습니다. 아직도 길바닥에서 잘 때의 냉기가 느껴져요. 하지만 그 보다 더 차가운 한인들의 시선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박씨는 LA다운타운 소위 ’자바‘라고 불리는 의류도매시장에서 소규모의 의류업체를 꾸려왔다. 16년전에 이민와 아내와 아들과 함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경기침체가 시작되며 매출 규모가 2007년 보다는 줄긴 했지만 박씨 가족은 글렌데일시에 남부럽지 않은 주택을 마련해 아내가 해준 따뜻한 식사를 즐기며 아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2009년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매상 감소에 따라 빚이 늘기 시작했다.

박씨는 “사업이 힘들긴 했지만 19년동안 가꾸어 온 아메리칸 드림이 하루 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올해 초 사업이 기울면서 주택 모기지 페이먼트가 밀리기 시작했고 은행에서는 계속 차압에 대한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1달 노티스와 3일 노티스를 받을 때까지도 모기지 페이먼트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박씨는 독한 결심을 했다. 아내와 강제로 이혼하고 가족을 한국으로 보내기로 한 것.

“아내와 아들을 한국으로 보낸 후 연락을 끊었어요. 가족들은 왜 내가 이혼을 고집했는 지 모를 거예요. 하지만 가족이 모두 길바닥에 나 앉을 수는 없으니까요. 또 자식에게 노숙자가 된 아비의 모습을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어요. 가족들이...너무 보고 싶지요. 그저 한국에서 잘 살고 있기만을...”

가족 이야기 꺼내던 박씨의 목은 어느새 메어 있었다. 한국에 동생이 있지만 동생 역시 힘들게 사는 처지를 알기 때문에 염치없이 한국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홀로 길거리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돈 한푼없이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에서 한인회를 찾아 갔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굶어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인적 없는 뒷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길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기 위해 깔은 신문지 위에 앉아 마자 잠이 들었다. 이미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인없는 길거리라고 아무 곳에서나 잠을 청해서는 안된다. 노숙자 선배들이 이미 좋은 잠자리를 모두 선점하고 있고 저 마다 구역이 있어 잘못하면 싸움이 나기 쉽다. 비를 막아줄 수 있는 처마가 있고 경비가 없는 곳이 명당이다.

길에서 잠을 청한 지 셋째날이 되자 자살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0번 프리웨이 위에 올라 섰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한인타운을 방황하다 윌셔와 세인트 앤드류스가 만나는 곳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게 됐다. 지나가던 흑인이 교회에서 음식을 나눠준다고 귀뜸을 했다.

한시간을 줄서서 기다린 끝에 홈리스용 종이백을 받을 수 있었다. 종이백에는 칫솔 1개 치약 1개 초컬릿 2개 라면 1봉지와 스펀지 케이 들어 있었다. 박씨는 그 자리에서 모든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창피한 게 어디있나요. 3일만에 맛보는 음식이었는데요.”

종이백에는 한인타운 인근에서 무료급식을 주는 장소가 적힌 종이도 함께 있었다. 그 이후 박씨는 급식단체가 쉬는 토.일요일을 제외한 월~금요일까지 하루 한끼는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고민이었던 잠자리도 한인 홈리스를 만나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곳에서 밤이슬을 피할 수 있게 됐다. 홈리스 쉘터(shelter)를 찾아 다니면서 샤워나 세수도 해결할 수 있었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노하우도 생겼다.

박씨는 “주문을 하지않고 계속 앉아 있으면 점원에게 쫓겨 난다”며 “쓰레기통에서 컵을 하나 찾아 테이블에 올려 놓아야 오랜 시간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쓰레기통에서 리필이 가능한 커피 컵을 찾는 날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LA한인타운에서 홈리스가 식탁에 앉아 따뜻한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일주일에 한 번 있다. 세인트 제임스 성공회 교회가 매주 금요일 제공하는 저녁이다. 매주 금요일 박씨는 세인트 제임스 교회를 찾았다.

어느날 식사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던 박씨에게 김요한 신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김 신부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박씨를 위해 자그마한 방을 하나 구해준 것. 요즘 그는 한 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요즘같은 불경기에 아무 능력도 없는 50대 실직자가 일자리를 구하기는 힘들겠지요. 하지만 종교와 과거를 묻지 않고 도움을 주신 신부님 덕분에 자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됐어요.”

글=LA 중앙일보 진성철 기자
사진= 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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