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노사 원칙을 버려선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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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재계가 노조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을 허용할 경우 노사정(勞使政)위원회 탈퇴는 물론 정치활동도 불사하겠다는 강경 입장을 천명한 가운데 노동계도 정부와 사용자를 상대로 한 '겨울투쟁' 을 본격화, 노사정 사이에 다시 긴장이 일고 있다.

급기야 양측의 갈등은 한국노총의 산별(産別)대표와 일부 조합원들이 어제 전경련 회장실을 점거해 농성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노사의 정치활동은 노동계의 경우 최근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노조의 정치자금 기부가 사실상 허용된 데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양대 노총이 적극적 참여 채비에 나서고 있다.

여기에 재계도 정치활동을 선언하고 의정 감시를 위한 무슨 위원회까지 만들겠다고 한다.

걱정은 정치활동을 표면에 앞세운 이같은 공방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노사마찰이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라는 첨예한 이해대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문제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를 탈퇴하고 한국노총도 외면하자 정부가 지난 6월 '6.25 노정합의' 를 통해 관련 조항의 연내 법 개정을 약속하면서 불거졌다.

노조전임자의 임금지급 금지는 재정자립 기반을 갖추지 못한 노동계에는 사실상의 노조활동 중단과 다름없다는 우려를 모르는 바 아니다.

때문에 노동계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불만을 제기해 왔다.

그러나 이는 지난 97년 3월 노동법 개정에서 여야 합의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노조전임자 급여 문제는 2002년 시행 예정으로 본격 시행은 아직 2년이 남았다.

따라서 아직 시행도 안해보고 시행이 몰고올 문제도 모르는 상태에서 폐기나 개정을 고집하는 것은 성급한 처사다.

또한 노동계는 전임자의 임금지급을 법으로 제한한 나라가 우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나 그것이 이슈가 돼 법 제정에까지 이른 우리 노사 현실도 되새겨 봐야 한다.

사태가 이렇게 번진 데는 정부의 무소신도 빼놓을 수 없다.

노사정의 틀 유지에 매달려 노조를 무마하기 위해 한 약속이 갈등을 확대 재생산해낸 셈이다.

또 정치권도 표 의식이 작용해 노동계를 끌어안기에 급급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노사가 지금처럼 노사정위를 외면한 채 정부와의 직접 상대방식만 추구한다면 해결점을 찾기 어렵다.

문제가 있다면 실력행사나 행동이 아닌 토론을 통해 해결해야 하며 이를 위해 노사정위가 마련돼 있는 것이다.

한편 정부와 일부 정치권에서는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 문제를 부분적으로 수정, 패키지로 묶어 조정을 시도하는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칙을 못 지킬 바에야 서로 한발씩 물러서자는 정치적 타협안이다.

설사 그것이 대안이 된다 하더라도 노사 당사자와 국민이 납득하기 위해선 반드시 노사정위 테두리 안에서 성실히 토의되고 신중히 결정해야 할 사안이다.

이런 논의없이 남의 사무실을 점거하고 길거리로 나서며 파업 불사를 외치는 것은 달라진 노동단체의 면모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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