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노 전 대통령 추모 열기 정치적으로 변질되지 말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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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한여름처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제 오후 서울 덕수궁 분향소엔 추모 대열이 끊이지 않았다. 하얀 국화꽃을 들고 검은 리본을 단 남녀노소가 묵묵히 돌담길을 따라 늘어섰다. 저녁에 비해 추모 인파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30분쯤 기다려야 짧은 헌화가 가능했다. 돌담길 중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붙은 담장 아래 하얀 국화 수십 송이와 타다 만 촛농이 놓여 있다. 정부에서 만든 분향소 81곳, 전국 사찰과 각종 사회단체 등이 만든 분향소가 200곳 가까이로 늘어났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다르겠지만 전직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는 추모의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대표했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이며, 가슴앓이 끝에 죽음을 택한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적어도 국민장을 치르는 기간만큼은 온갖 이해를 떠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 마음을 공유할 것이며, 또 공유해야 맞다.

그러나 간혹 슬픔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24일 오후 조문을 위해 봉하마을에 도착한 김형오 국회의장의 경우 마을 주민과 일부 조문객들이 막아서는 바람에 쫓겨났다가 새벽에 ‘도둑 문상’을 했다. 물과 함께 험한 욕설 세례를 받아야 했다. “살려내면 조문하게 해주겠다”는 절규도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문재인 변호사가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막무가내였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이회창 선진당 총재도 문상을 못 하고 돌아섰다. 이명박 대통령도 직접 문상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일부에선 봉변을 우려해 말리고 있다. 이들이 비록 정치적 견해나 입장은 달라도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굳이 ‘원망하지 마라’는 유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조문을 막는 행위는 고인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라 짐작된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추모 열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듯한 일부 행태다. 덕수궁 분향소 옆에선 ‘이명박 탄핵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 옆엔 ‘그냥 가지 말고 꼭 촛불을 들자’ ‘낮엔 국화, 밤엔 촛불’ 등이 적힌 피켓이 서 있다. 한쪽에선 ‘미친 소’를 외치는 연사를 둘러싼 일군의 무리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일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분향소는 그런 곳이 아니다.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면서도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찾아온 순수한 추모객을 내쫓는 행위다.

29일 경복궁 뜰에서 거행될 예정인 국민장은 온 국민의 아픈 마음을 추스르는 엄숙한 장례가 되어야 한다. 일부 세력에 휘둘리는 정치집회가 되어선 안 된다. 슬픔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한 애도 행위가 필요하다. 경찰도 지나친 통제로 추모객의 반발을 초래하는 우(愚)를 경계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표출된 민심을 수렴하는 것은 국민장 이후 여야 정치권의 몫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