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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면 공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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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선체 길이 266m, 총배수량 2만7000t, 1960년 이후 37년간 총 항해 거리 100만 해리. 걸프전 등 실전 경험 풍부. 프랑스 해군의 자존심으로 통했던 핵 추진 항공모함 클레망소 호의 위용을 말해주는 이력서다. 하지만 이 배의 ‘말년’은 불명예스럽기 짝이 없다. 1997년 퇴역한 뒤 ‘누울 자리’를 찾지 못해 세계 각국을 떠돈 것이다. 해체 작업을 위해 찾아간 스페인·터키·인도에서는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항공모함 곳곳의 기자재와 부품에 인체에 치명적인 발암물질 석면이 700t가량 포함돼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클레망소 호는 지난 2월에야 겨우 해체업자를 만나 영국 북동부의 티스 부두로 옮겨졌다.

일본 열도가 석면 공포에 휩싸인 것은 2005년의 일이다. 1970년대 석면을 재료로 한 건축자재와 수도관을 만들던 업체 구보타의 옛 종업원 가운데 4분의 1가량이 암의 일종인 악성 중피종으로 숨졌다는 사실이 발표되면서부터다. 중피종은 폐를 둘러싸고 있는 흉막 등에 생긴 종양을 말한다. 석면 피해가 30여 년이 지난 뒤 확인된 것은 그만큼 잠복기가 길기 때문이다. 심지어 석면 제품 공장에서 일하던 종업원의 아내 세 사람도 같은 병으로 숨진 사실까지 드러났다. 남편의 작업복에 묻어 있던 석면 가루를 지속적으로 마신 게 원인으로 지적됐다. 80년대까지 건축자재로 석면이 많이 사용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석면 제거 작업을 위해 학교 전체가 이사를 가는 사례도 잇따랐다.

석면은 한때 ‘마법의 광물’로 각광 받던 소재였다. 내열성·방화성이 뛰어나 단열재로 많이 쓰였고 자동차의 브레이크 패드나 클러치 판 등에도 사용됐다. 머리카락 굵기의 수천분의 1에 불과한 미세한 섬유질 입자가 호흡기에 들어가면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70년대부터다. 하지만 선진국들조차 석면 사용 금지 조치를 취한 건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유럽위원회(EC) 환경연구소는 ‘빠른 경고, 뒤늦은 교훈’이란 이름의 보고서에서 석면 대책 마련이 늦었다고 지적했다.

베이비파우더를 비롯한 약품·화장품에 석면이 함유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도 석면 피해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사용 금지된 물질이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지금 곳곳에서 재개발이다 재건축이다 해서 철거되고 있는 건물들이 공기 중으로 석면을 내뿜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한국은 경고도 늦고 교훈도 늦었지만 단단히 대책을 마련하는 일만큼은 서둘러야겠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