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엄마의 인형’ 마마걸은 슬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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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선 남자랑 팔짱 끼지 마라.” “알았어, 엄마.” “친구라도 양보만 하지 말고 따질 건 따져야 한다.” “걱정 말라니까.”

전업주부 M씨(49).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딸(26)이 걱정돼 하루라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딸도 2002년 고교를 마치고 유학 간 뒤 매일 전화로 일상을 알려준다. 남자 친구와 데이트한 일, 여자 친구와의 갈등 등 시시콜콜한 내용이다. 딸은 친구 관계, 학교 생활 등 사소한 문제까지 엄마에게 조언을 구한다.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다. 이날도 며칠째 끌어왔던 친구와의 갈등에 대한 지침을 주면서 통화를 마무리했다. M씨는 “피곤해도 세수 잘하고 팩 붙이고 자”라는 마지막 지시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그냥 두면 어떻게 일을 해결할지 안심이 안 된다”고 말한다.

딸도 “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엄마 지시를 따르는 게 안전한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이견이 있을 때가 있다. 특히 남자 친구와의 데이트 내용을 일일이 물어본 뒤 옛날식 조언과 매너를 강요할 때는 짜증이 난다. 하지만 ‘다 날 생각해선데…’라는 생각에 엄마의 지시사항을 충실히 따른다.

마마보이에 이어 마마걸이 늘고 있다. 마마걸은 마마보이와 마찬가지로 자율성이 없는 엄마에게 의존하는 딸을 일컫는다.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마마보이가 먼저 등장했다. 하지만 남녀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고, 한 자녀 가정이 늘면서 딸에 대한 부모의 왜곡된 교육관이 마마걸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사렛유치원(경기도 평택) 정은혜 원장은 최근 지은이(5·여·가명)가 그린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의 팔이 없는 자화상을 그린 것이다. 상담해 보니 엄마 의존증이 드러났다. 엄마가 세수하고, 밥 먹고, 신발 신는 것까지 챙겨줘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 원장은 “90명의 원아 중 10∼15%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못해 학기 초 유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불안증이 사회부적응으로

박모(32·여)씨는 좋은 대학을 나와 어머니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과의 성격 차이 때문에 이혼하려 했지만 어머니가 “별 남자 있느냐”고 해 그냥 살았다. 남편이 주사를 부리자 한두 번은 참았다. 주사가 계속되자 어머니에게 알렸고 어머니는 “당장 이혼하라”고 요구했다. 아이 때문에 주저했지만 어머니가 워낙 완고해 ‘이혼이 좋은 선택인가 보다’고 생각해 수속을 밟았다. 그러다 보름 뒤 “며칠 후에 이혼하겠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번엔 어머니가 “애도 있는데 좀 더 참아라”며 새로운 주문을 했다.

박씨는 어머니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혼란스러워졌다. 이제껏 어머니 말에 순종하며 살았는데 이혼이라는 중요한 사건 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어머니 태도가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앞으로 어머니 아니면 누굴 의지하고 살아야 하나’고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다 결국 정신과를 찾았다. 담당의사는 박씨의 증세를 불안증과 심리적 미성숙으로 진단했다. 즉 불안증이 있는 마마걸인 것이다.

최근 국내 한 결혼정보회사가 한 달간 결혼 상담을 신청한 1164명을 분석한 결과, 초혼 여성의 33.5%는 어머니(혹은 어머니를 대신한 가족)가 신청자였다. 남성 97.4%가 본인이 직접 상담 신청한 것과 대조적이다.

마마걸은 자신의 중요한 결정을 어머니나 직장 상사 등에게 의존한다. 동료·선후배 사이에선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으로 통해 신뢰감을 얻지 못하고 무시당한다. 마마걸은 사회부적응증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고학력 어머니들이 마마걸 양산”

마마걸은 고학력 전업주부와 함께 등장했다. 건국대병원 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여대생이 급증한 1960년대 후반 이후 대학을 다닌 세대가 마마걸 양산의 주역”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딸을 조정·통제할 지적·경제적 능력이 있고, 딸을 통해 대리만족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유한익 교수는 “딸이 독립해 자신과 분리되는 상황에 불안을 느끼는 어머니는 성인이 된 딸에게 끊임없이 심적·물적 후원을 하면서 딸이 자신에게 의존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마걸과 어머니는 상호 의존관계라는 것이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최승식 기자


집착 끊으면 믿음직한 내 딸, 든든한 우리 엄마

‘군대 간 애인을 기다리듯, 딸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 보라’. 딸이 성숙한 인간으로 성공적인 삶을 누리길 원하는 어머니라면 마음에 새겨 볼 말이다.

아직은 딸 문제에 앞장설 만큼의 기력도, 재력도, 자신감도 있는 마마걸 어머니들. 하지만 한 세대나 차이 나는 딸의 미래를 평생 관리해 줄 순 없다. 따라서 진정 딸을 사랑한다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부터 독립성과 책임감을 키워줘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어릴 때부터 주어진 과제를 스스로 수행하고 성취감을 맛보도록 인내심을 갖고 관찰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혹은 또래와 사귀면서 내 딸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초래되는 문제는 어머니가 ‘절대’ 대신 해결해 주지 말아야 한다. 

유아 때 걸음마 스스로 하도록

정신의학적으로 독립의 첫 단계는 걸음마다. 따라서 이때부턴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격려하면서 자립심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혼자서 식사하는 것은 1단계. 처음엔 흘리고 쏟더라도 뜨거운 음식 등 위험한 상황이 아닌 한 지켜보자.

이 닦기, 세수하기, 옷 갈아입기, 자기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치우기 등 자기 관리도 처음엔 아이와 함께, 익숙해지면 혼자 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아이의 옷·장난감·머리핀 등을 고를 땐 최대한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네가 뭘 알아?” “이게 좋으니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라고 말하는 것은 딸을 마마걸이 되도록 부추기는 길이다.

용납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다. 밥투정은 대표적인 예다. 식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은 책임 있는 성인이 되는 기본 자세다.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양세원 교수는 “식사 때 밥을 안 먹겠다고 떼를 쓰면 다음 식사 때까지 간식을 주지 말라”고 조언했다.


숙제 대신 해주면 역효과

성인의 자립성이 강조되는 서양에선 신생아 시절부터 아이를 부모와 다른 방에서 재운다.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잠을 청하는 것은 독립의 시초다.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유한익 교수는 “세 돌 이후엔 따로 잘 수 있어야 한다”면서 “아이가 혼자 자길 거부할수록 따로 재우는 훈련이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치원생 시절부터 사교육은 아이와 합의해 결정하자. 꼭 필요하다 싶은 과목을 아이가 싫어할 땐 설득한 뒤 시작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또래와의 놀이’가 어린이 두뇌 개발, 사회생활, 독립심 키우기 등에 가장 좋은 교육의 장임을 잊지 말라고 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엔 아이의 숙제를 대신 해주지 말 것. 간혹 성적 향상을 위해 자료를 찾고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학교 숙제는 엄마가 하고, 사교육을 통한 영어·수학 등은 아이가 하도록 하는 어머니가 있는데 이는 무책임한 마마걸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엄마는 딸의 롤모델

“내가 너 때문에 이런저런 궂은 일까지 해야 한다”는 식의 푸념은 딸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한다. 딸의 뇌리에 ‘독립적인 성인은 싫은 일을 도맡아 하는, 되고 싶지 않은 존재’라는 인식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대신 자립하는 성인의 바람직한 측면을 심어줘야 한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어머니 자신이 보람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면서 딸의 일에 일일이 개입할 경우, 어머니의 뜻과는 반대로 ‘지금 보여주는 어머니의 삶’이 딸의 역할 모델로 자리 잡게 된다.

결론은 어머니도 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보람 있는 자신의 일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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