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공직자 횡령, 솜방망이 처벌로 근절되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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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복지 담당 공무원들의 횡령 실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났다. 기초생활수급자와 장애인 등에게 돌아가야 할 예산을 빼돌려 아파트를 사고 외제차를 굴리며 해외 여행을 다닌 파렴치한 행위는 누가 봐도 중대한 범죄다. 대통령도 최근 라디오 연설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가야 할 돈을 횡령한 것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 단언하고 일벌백계를 강조했다. 맞는 소리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껏 횡령을 저지른 상당수 공직자에 대해선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 사실이 밝혀졌다. 범죄의 피해자인 국민 입장에선 황당한 노릇이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06~2008년 각 행정기관 및 유관 단체가 공금 횡령 공직자를 자체 적발한 사례 331건을 분석한 결과 열 건 중 여섯 건은 형사 고발하지 않고 내부 징계만 한 것으로 나타났다. 3000만원 이상 거액을 횡령한 113건 중에서도 40건을 고발 없이 마무리했다고 한다. 기관장을 포함한 조직원들이 외부에 알려질까 싶어 쉬쉬하며 덮어버린 것이다. 용산구청 8급 직원 송모씨가 2003년부터 2년여간 1억여원을 횡령했다 적발된 뒤에도 몇 달간 같은 부서에서 계속 근무한 것만 봐도 그렇다. 상사가 관리 책임을 추궁당할까 봐 상부에 보고조차 안 한 것이다. 지난달 서울시 특별감사에서 걸린 뒤에야 송씨는 검찰에 고발됐다.

그간 횡령 비리가 빈발했던 데는 복잡한 복지행정 체계나 부실한 감사 외에 미약한 처벌도 한몫했음이 틀림없다.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나랏돈을 슬쩍 했다 걸려도 공무원 옷을 벗는 정도의 가벼운 처벌로 그친다면 횡령의 유혹은 커질 수밖에 없다. 추경을 포함해 재정이 엄청나게 풀린 마당에 이런 상황을 묵과해선 안 된다. 국고가 엉뚱한 곳으로 새는 걸 막으려면 횡령 공직자들에 대해 형사 고발을 의무화하는 등 처벌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현재 국무총리훈령으로 된 ‘공무원의 직무 관련 범죄 고발지침’은 ‘행정기관장이 공무원의 범죄 사실을 발견하면 형사소송법 234조 2항에 따라 고발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단, 세부 기준을 기관별로 제정·운영토록 한 게 빌미가 됐다. 권익위 조사 결과 세부 기준이 없거나, 있어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권익위는 조만간 각 기관에 규격화된 고발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채택하도록 권고할 예정이다. 그러나 기관장이 그 기준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말짱 헛일이다. 따라서 횡령 사건 처리를 점검하는 정기적인 감사도 수반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