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 2명, 평양 보위사 초대소 억류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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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하루 만에 평양 압송
“간첩 시인 받으려 조사 중”
미국 요청에 정보원 풀가동

미국 여기자 납치사건이 발생한 중국 지린(吉林)성 투먼(圖門)시 쪽에서 21일 촬영한 북한 남양시 모습. 남양시의 기차역 건물에 김일성 전 주석의 사진이 걸려 있다. [투먼 AFP=연합뉴스]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여기자 2명의 체포 경위와 소재에 대한 소상한 정보가 우리 정보 당국에 의해 파악됐다. 익명을 요청한 정보 소식통은 23일 “여기자 2명이 현재 평양 근교의 보위사령부(북한의 정보·보안부대) 관할 초대소에 머물며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미 관계 기관이 서울의 정보 협조 채널을 통해 관련 정보의 조속한 제공을 요청해와 대북 정보망을 가동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또 “함경북도 지역 북·중 국경을 넘어간 두 여기자는 관할 27국경경비여단 초병에게 체포됐다”며 “북한 보위사령부가 주도해 하루 만에 평양으로 압송해 입북 경위 등을 조사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 당국이 이들을 평양으로 하루 만에 긴급 이송한 것은 그만큼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계 당국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미국 커런트TV 소속 여기자인 한국계 유나 리(Euna Lee)와 중국계 로라 링(Laura Ling)이 북·중 국경을 넘은 건 17일 오전 3시쯤이었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투먼시 외곽의 웨칭(月晴)이란 마을로 두만강 강폭이 좁고 민가가 드물어 몰래 이산가족을 만나거나 탈북자 은신처로 사용되는 곳이다. 이들은 당초 중국 땅에서 북한 쪽을 취재하기로 했지만 취재 욕심에 국경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로 안내한 조선족 가이드가 머뭇거리는 사이 앞서가던 여기자들에게 북한군이 “꼼짝 말라”며 수하(상대 확인을 위해 암호 등을 묻는 것)를 했으나 응대하지 못해 체포된 것으로 정보 당국은 보고 있다.

27경비여단 소속 초소본부로 끌려간 이들은 곧 여권과 신분증을 통해 미국 국적임이 드러났다. 정보 관계자는 “미국인 여기자를 체포했다는 긴급상황은 국경경비부대를 총괄하는 보위사령부에 즉각 보고됐다”며 “함북 지역을 관할하는 청진의 9군단 사령부에도 전해진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현장에 투입된 보위사령부 특수요원들은 추가 조사를 벌인 뒤 18일 오전 평양으로 두 여기자를 압송했다. 북한은 무장호송차를 앞세웠고 여기자를 두 대의 차량에 각각 나눠 태워 서로 접촉하지 못하도록 한 상황이 우리 첩보망에 잡혔다고 한다.

여기자들의 현재 상황과 관련, 또 다른 정보 관계자는 “군이 책임진 국경경비와 관련된 문제라 보위사가 신병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위사는 여기자들이 소지했던 취재 녹화테이프나 카메라·취재수첩 등을 정밀 분석해 군사시설물 촬영을 포함한 군사 정탐 행위가 있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군부가 주도하는 보위사 조사가 마무리되면 곧 국가안전보위부(북한 최고의 정보기관)로 넘겨지는 절차를 밟을 것이란 얘기다.

우리 정보 당국의 신속한 관련 정보 제공과 분석에 미국 측은 “짧은 시간에 관련 첩보를 수집한 한국의 정보 능력이 놀랍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미국 측은 이번 사태가 언론에 공개되기 이전까지 북한과의 물밑접촉을 시도했으나 원만치 않았다는 게 관계자의 귀띔이다. 여기자들의 억류 상황에 대한 정보를 파악 못해 속을 태웠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는 사건 발생 이틀째인 19일 “보도를 본 것 외에는 실제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평양의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한 정도였다.

미 정보기관은 결국 한국 측에 여기자들에 대한 휴민트(HUMINT·정보요원 등을 통해 얻은 인적 정보)를 제공해 달라는 뜻을 밝혔다. 인공위성·감청 등 첨단장비를 통한 대북 첩보에는 우위에 있지만 인적 정보 수집에는 한국의 정보기관이 월등하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이영종 기자

“북한, 여기자 2명 차에 따로 태워 압송”

정부, 단기간에 정보 제공하자
미국 “인적 정보는 한국 탁월”
미 국방정보국 기동팀 급파
용산 대책본부 암호는 ‘팝케이’

우리 정보 당국은 “북한이 여기자들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스파이 혐의를 시인받는 데 주력할 것”이란 설명을 미국 측에 해주었다고 한다. 북한 정보기관의 집요한 신문기술을 감안할 때 미 여기자들이 자신들이 듣고 보고한 내용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특히 취재 과정에서 북한 쪽을 촬영한 화면이나 중국 내 탈북자와 관련한 취재자료들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현재로서는 새벽에 북한군 초소가 있는 국경을 통해 침입했다는 점에서 간첩 혐의를 적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북한에선 20년 이상의 형이 가능한 중범죄다.


정보 관계자는 “북한은 여기자 조사 과정을 모두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등 치밀하게 미국과의 협상에 대비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스파이 행위에 대해 인정하는 장면을 담으려 주력할 것이란 판단이다. 필요할 경우 이 장면을 북한 관영 TV 등을 통해 공개한 뒤 스파이 행위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준비 작업인 셈이다. 또 추후 ‘스파이 행위를 했지만 아량을 베풀어 석방한다’는 식의 대미 카드로 써먹을 수 있다는 분석도 정보 당국은 하고 있다.

이와 함께 향후 주민들에게 “공화국을 와해시키려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 행위에 대해 경각심을 갖자”는 취지의 사상교양에 활용할 것이란 분석도 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지난해 12월 이례적으로 “김정일 위해를 위한 간첩이 침입했다”고 주장하며 긴장감을 조성했다. 보위부가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이번 사건을 최대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보 관계자는 “북한이 여기자들에 대해 집중적인 신문을 하면서도 이들에 대해 가혹행위 등은 자제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자들이 석방돼 미국으로 돌아간 뒤 기자회견 등을 할 경우 북한으로부터 인도적 처우를 받았다고 말하도록 미국식 식단의 음식과 침대형 잠자리 등을 챙겨주는 치밀한 계산을 할 것이란 설명이다.

◆동향 정보 촉각 세운 미 정보망=미 국방정보국(DIA) 한국 지부장인 찰리 C 몽크 대령은 지난해 6월 부임 이후 가장 숨가쁜 날을 보내고 있다. 미국인 여기자 두 명이 17일 북·중 국경을 넘었다 북한에 억류된 사건이 터진 때문이다.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드래건호텔 뒤편에 있는 지부 건물에서는 수시로 대책회의가 열린다. 한·미 정보요원들 사이에 팝케이(FOBK)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는 이곳이 여기자 억류사건의 대책본부인 셈이다. 서울과 워싱턴 간 암호전문 발송 건수도 부쩍 증가했다고 한다. 사건 직후 미국에서 이번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기동팀이 급파되기도 했다. 미 중앙정보국(CIA) 서울거점 요원들도 합세했다.

서울의 CIA와 DIA가 월 1회 하던 지역안보협의 형식의 토의도 거의 매일 열리고 있다. 이들이 억류 여기자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운 건 미국 내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NIA)의 특별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 정보 소식통은 전했다. 여기자들이 소속된 커런트TV의 회장인 앨 고어 전 부통령의 부탁을 받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각별한 관심을 나타낸 사안이란 점도 이들을 긴장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영종 기자

◆휴민트(HUMINT·Human Intelligence)=정보요원이나 내부 협조자 등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말한다. 이와 달리 레이더나 전파 분석 장치 등 첨단 장비를 사용해 포착하는 정보를 시진트(SIGINT·Signal Intelligence)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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