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금융개방은 신중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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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두해 전만 하더라도 안정 속의 고속성장을 자랑하며 동아시아의 '기적' 을 주도하던 태국이 올해초부터 외환투기에 시달려오더니 최근에는 바트화의 폭락으로 국제통화기금 (IMF) 과 일본 등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위기에 몰리고 있다.

태국 화폐가 폭락을 거듭하고 있는 배경과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위기의 발단은 90년대초부터 시작된 호경기가 금융시장의 개방과 맞물리면서 밀려들기 시작한 외국 자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90~95년동안 연평균 국내총생산 (GDP) 의 10%가 넘는 외자가 유입되면서 부동산 가격과 주가가 치솟고 경상수지가 악화되는 등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경기가 하락세로 돌아서자 은행이 부실화하는 등 거품이 빠지고 외국인 투자가들이 떠나면서 대외지급능력이 우려되는 전형적인 경기과열.급랭의 혼란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의 금융산업도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가입 이후 선진국 수준의 개방된 체제로 그 구조가 급속히 바뀌어가고 있다.

물론 우리는 동남아국가와 달리 현재 외환위기를 우려할 필요도 없으며 외환시장의 불안요인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그러나 재벌기업의 부실문제가 장기화하고 북한의 도발을 예측할 수 없는 이상 외환시장의 안정을 안심할 수도 없으며 게을리해서도 안 될 것이다.

외환시장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싫든 좋든 외국인 투자가들의 협조와 이해를 유도할 수 있도록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외환위기로 곤욕을 치른 나라의 경우 대부분 외국인 투자가들을 안심시킨다는 명목 아래 정책조정을 뒤로 미루면서 경제문제를 덮어두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면 급작스레 정책을 바꿔 사태를 악화시키곤 했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무엇보다 투자대상국 경제정책의 불투명성과 일관성의 결여를 싫어하고 경계한다.

바로 이때문에 외국인 투자가들이 국내정책을 믿고 이해하도록 설득해 신뢰성을 구축하는 일이 외환시장 안정화의 필수조건이 되고 있다.

지금처럼 기업의 부실상태가 어느정도 심각한지, 앞으로 부실기업은 누가 주체가 돼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 등이 계속 의문점으로 남아 있는 이상 외국인 투자가들의 의혹은 더욱 증폭되다가 어느날 어떤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이들이 갑자기 떠나버리면 외환위기가 닥쳐올 수도 있다.

외국인 투자가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본유출입 (流出入) 과

환율정책에 대한 기조를 명확히 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본정책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단기투기성 자금이 과다하게 유입될 때에는 외환거래세를

부과하며 외자가 급격히 유출되는 경우 정부가 개입할 것을 미리

공표해놓으면 설사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경우에도 외국 투자가들의 반발은

그리 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외국투자가들의 신뢰를 얻는다고 해서 외환시장이 저절로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국내외 금리차가 큰 경우 자본시장 개방은

환율.금리.주가.물가를 불안정하게 해 외환투기를 자극할 수 있으나 개방후

국내외 금리차가 어떻게 줄어들어 균형을 되찾아가는지 그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없어 정책 대응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처럼 개방이 경제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알 수 없다면 그때그때

상황변화를 고려해 개방 속도와 폭을 조절하는 정책운영의 신축성을

확보해야 한다.

만일 외환시장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하다면 외국인 투자가들도 개방정책의

조정을 이해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와 같이 작은 경제가 혼자 힘으로 국제금융을 쥐고

흔드는 대형투자은행.기금운영자들의 투기행위와 횡포를 막을 수는 없다.

이미 국제금융시장의 비합리성, 그리고 때로는 파괴적인 행태는

규제대상으로까지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국제금융시장에서 규제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설사 필요성이

있더라도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

그러나 하나의 대안으로 특정지역의 국가들이 정책적으로 공동보조를

취하며 필요시 상호지원을 약속하는 등 외환위기를 사전에 방지하는

협력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아태경제협력체 (APEC) 를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국제금융협력체제의 형성을 추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영철 고려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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