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짚기>'글꼴 혁명' 훈민정음 창제후 550여년 고정관념 허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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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한글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문자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하지만“어째서인가?”라는 물음에

맞닥뜨리면 말문이 막히곤 한다.

한글 폰트(글꼴)디자이너들은 다르다.자신만만하다.한글을 시각디자인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나라 글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 자음과 모음을 이루는 기본요소는'.''─''│''''□''△'등 여섯가지다.

이는 모든 디자인의 근간을 이루는 기하학적 형태다.즉 우리문자는 그 자체가 시각디자인이다.더욱이 우리의 글은 생김새와

발음이 일관성을 갖는다.기본모양에 획을 더해 글자를 만드는'가획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예컨대'ㄴ'에 획을 추가해'ㄷ'을 만들고 여기에 가획해'ㅌ'을 창조했다.획이 늘어나는 시각적 변화와 함께 발음도 강해진다.

'─'위에 점을 찍어 만든 모음'ㅗ'는 밝은 느낌을 주고 아래에 점을 찍은'ㅜ'는 어두운 어감이다.땅 위와 땅 아래의 이미지가 소리에도 반영된다.청각의 변화를 시각화시켰다.그래서 한글의 이미지에선 소리까지 읽힌다.

이렇듯 뛰어난 재료로 미(美)의 세계를 창조하는 한글 폰트 디자인이 이 감성의 시대를 풍미하고 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오랫동안 무관심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새로운 글꼴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말.한 글자씩 손으로 그려야 했던 진땀나는 작업이 컴퓨터 덕택으로 한결 수월해진 이후부터다.10여개 서체(書體)디자인 회사들은 매년 새로운 한글모양을 수십개씩 만들어냈고 이젠 7백~8백가지의 아름다운 글꼴들이 우리 주변을 장식한다.

낯선 글꼴에선 파괴의 에너지가 꿈틀거린다.지금 한글 디자인의 세계에선 5백년 넘도록 이어온 전통을 허무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이른바'탈(脫)네모틀'혁명. 난생 처음 연필을 쥐고 네모칸이 가득한 공책에 글씨를 한자씩 메웠던 옛 기억을 되살려보자.모든 글자를 같은 크기의 네모 안에 집어넣어야 했다.글씨의 크기가 같아야 한다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계속 지켜온 무언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맹약을 깬다.이는 단순히 기존 관념을 파괴하거나 이질적인 요소를 접합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도가 아니다.과학적 원리를 근간으로 삼는 혁신 운동이다.

대유공업전문대학 한재준 교수의 주장.“전통의 네모틀 체계에선 한개의 자음이 30여가지의 형태를 갖게 됩니다.가령 기역자의 경우 '가''강''고''귀'에 쓰이는 모양이 전부 다르죠.한개의

폰트를 만들려면 2천3백50글자를 도안해야 합니다.같은 자모(字母)라도 형태가

틀리기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26자면 족한 영어와 도저히 경쟁이 안되죠.”

그래서 혁명적인 글꼴이 나왔다.우선 폰트 한벌의 글자수를 2천3백50자에서 60여자로 줄였다.'가''강''고''귀'에 쓰이는 기역자를 모두 같게 만들었다.모음도 마찬가지다.이런 작업을 통해 기존의 네모틀은 여지없이 파괴됐다.

어떤 글자는 길쭉하고 어떤 건 펑퍼짐하다.크기도 다르다.그렇다면 과학을 위해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희생된 것일까?“탈네모틀 글꼴은 새로운 미학(美學)을 창조했습니다.리듬감이 풍부하고 감성이 가득한 서체죠.”윤디자인연구소 임진욱실장의 설명이다.

탈네모틀 혁명의 성과는 눈부시다.광고등 각종 인쇄매체에서 이러한 글꼴들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최근엔 기존의 2천3백50자 체제를 유지하면서 탈네모틀 글자의 이미지를 받아들인'절충형'폰트도 속속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글꼴의 탄생이 파괴의 힘만을 작동원리로 삼는 것은 아니다.여느 디자인 분야처럼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작업 역시 꾸준하다.윤디자인연구소가 최근 선보인 폰트'고인돌'.찰흙을 손으로 비벼 만들어낸 느낌을 살리기로 했다.부드러운 가운데 직선적인 힘을 주는 글꼴이 만들어졌고'진흙''항아리''질그릇'등의 이름을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고인돌'이란 이름이 붙여졌다.이런 과정을 거쳐 새롭게 형상화된 문자들이'무소체''스트레스체''바람체'같은 감칠맛 나는 이름으로 계속 세상에 나온다.

글꼴의 매력은 명료함을 바탕으로 한다.흑백의 선명한 대비가 전해주는

아름다움과 영속성이 미술학도들을 계속 끌어모은다.20~30대1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만 폰트 디자인 회사에 들어갈 수 있다.

대학에서도 속속 타이포그래피(문자.활자 디자인)강좌가 생겨난다.디자인 회사에서 발간하는 서체 전문잡지를 구해 즐기는 마니어들도 늘고 있고 서체 공모전에 출품하는

대학생들의 작품수준도 예사롭지 않다.글꼴의 시장규모가 연간 7백억원대에 이르고

있어 산업적인 의미로도 비중은 크다.파괴와 생성의 활력을 한껏 뿜어내는 한글 글꼴.

삭막한 우리네 도시공간의 숨통을 틔우는 희망을 여기에 걸어볼 순 없을까.멋진 서체로 꾸며진 간판과 광고판 틈에서 심미적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강주안 기자

<사진설명>

훈민정음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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