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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 닦을 사람도 없지만, 조상님들 제삿밥 거르진 않을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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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오는 손님들이 다 그래, 워쩌케 혼자 사느냐고. 그럼 내 그라지. 왜 혼자냐. 주위에 전부 조상님이 계신데. 사당에 모신 분만 10분이 넘는데, 뭔 소리냐고. 허허.”
전답 사이에 오롯이 서 있는 종택의 모습이 너무도 적막해 보인다는 말에 노(老)종부는 대뜸 이렇게 응수한다. 단아하게 빗어 올려 은비녀를 꽂은 쪽머리만큼이나 꼿꼿한 기개가 느껴지는 대답이다.

사계 김장생의 13대 종부인 홍용기(85) 할머니. 설 연휴를 일주일 앞둔 17일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자리한 사계의 종택을 찾았다. 본채인 염수재(念修齋)를 중심으로 사당과 안채·사랑채·문간채로 이뤄진 종택 바로 뒤편으로는 사계 선생 등 일가의 산소가 빙 둘러 있을 뿐이다. 그나마 사계 선생 묘역이라고 관광객이 제법 많이 온다는데, 이날은 진돗개 혈통이라는 ‘백구’의 짖는 소리만 요란했다.

“원래 종택은 서울에 있었는데 고조부께서 일제 침략 때 모든 재산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하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염수재는 사실 사계 선생의 묘 앞에 지어 놓고 제사를 지내는 재실로 쓰던 집이죠.”홍 할머니의 큰아들이자 14대 종손인 김선원(63)씨의 설명이다. 공무원으로 연산읍장 등을 지내고 3년 전 정년 퇴임한 그는 문화해설사 자격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당시엔 인근에 다른 집들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떠나 폐가가 되다시피 해서 다 없앴어요. 곧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이 시작되면 좀 달라지겠죠.”덩그러니 남은 종택은 1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한 홍 할머니 혼자 막내 아들을 보살피며 지키고 있다. 막내아들은 지적장애인이어서 잠시도 떼어 놓지 못한다. 큰아들 내외도 함께 살았지만 직장과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30여 년 전에 내보냈다.

김씨는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데 문화재로 지정돼 함부로 고칠 수도 없는 집”이라며 “그래도 어머니는 절대 떠나려 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대신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 들러 어머니의 건강을 살핀다.관혼상제 전반에 걸친 지침서 '가례집람'의 저자인 사계의 종가로서 제례에 대한 부담도 적지 않았을 터다. 실제로 지금도 '가례집람'의 지침에 가장 가깝게 제례를 지내는 종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계의 불천위 제사상엔 수십㎝씩 쌓아 올린 각종 과실과 전·적 등의 음식이 올라간다. 사계 내외의 불천위 제사 비용은 광산 김씨 종중에서 지원해 준다고 한다. 제물 준비에만 300만원가량 든단다. 다른 기제사들은 25마지기 남짓한 땅에서 받는 도지 등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상차림은 아직도 상당 부분 홍 할머니의 몫이다. 종부인 며느리는 10여 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아 몸이 불편하고, 의사인 손자와 약사인 손자 며느리는 웬만한 제사 때는 참석하기도 힘들다.“세 가지씩 놓던 편도 두 가지로 줄였어. 헐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해. 정성이 중요한 것이니 그게 흉 될 건 아니지. 놋그릇 닦아 줄 젊은 사람들 없는 게 지금은 더 문제여. 1년에 최소한 한 번 이상 장정 세 사람은 매달려 박박 닦아 줘야 하는디…. 제기를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모르겄어.”

10년, 20년 후엔 어떻게 될까. 홍 할머니는 “앞으로 돌아올 일을 워쩌케 다 예상하고 살겄어”라면서도 “설마 이만한 조상님이 집이 비게 놔 두실라고. 조상님들도 제삿밥 거르시진 않을겨”라고 말한다. 김씨도 “종손으로서 항상 사계 선생에게 누가 되지 않게 살려고 한다”며 “하지만 제례 형식은 시대에 맞게 바뀔 수 있다는 게 사계 선생의 뜻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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