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검소하게 해도 제사엔 돈 많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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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일주일여 앞둔 20일 오후,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 안채 마루에서 종손인 윤형식씨 부부가 제기를 손질하고 있다.

봄날처럼 따뜻했던 20일 오후. 전남 해남 연동리 고산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綠雨堂)’에 도착했다.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76.오른쪽 아래 사진)씨가 기자를 맞았다. 그는 해남 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공 윤효정(고산의 증조부)의 18대 손이기도 하다. “아이고! 땅 끝 마을 이 먼 데까지 오느라고 참 고생했소.” 날씨만큼이나 정겨운 말투였다. 집 뒤의 비자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 하고 빗소리를 낸다고 해서 ‘녹우당’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녹우당은 평야가 많은 전라도 지역에서 만석꾼 집의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집터만 3만3000㎡(1만 평) 남짓 되지만 주변 땅을 합치면 165만㎡(50만 평) 정도가 된다.

사랑채로 들어간 윤씨는 한문으로 된 얇은 책을 꺼내들었다.'기대아서(寄大兒書)'였다. 고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해남 윤씨 집안의 가훈이나 다름없는 검소와 소박함을 당부한 글귀가 담겨 있다고 했다. 설 차례에도 그런 검소함이 배어 있다고 윤씨는 설명했다. “우리 집안은 예부터 복잡하고 요란하게 설 차례상을 차리지 않아요. 차례 모실 때 술과 함께 떡국과 반찬·산자·과일 정도를 차립니다. 제사 때와 달리 어육이나 육포를 내놓지 않는 것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차례상 차리는 방식입니다.”
해남 윤씨 종가에서 모시는 제사는 1년에 모두 25번이다. 고조부부터 부친 때까지 4대 봉사, 중시조인 어초은·윤효정 이후 직계 시제사가 17번, 그리고 어초은과 고산의 불천위 제사, 두 번의 명절을 치른다.

1년에 이 많은 제사를 치르려면 경비가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해남 윤씨 종가는 지금까지 ‘돈 걱정’을 해 본 적이 없다. “종가가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조상을 제대로 모실 수 있습니다. 정성이 첫째지만 일 년에 수십 번 있는 제사를 아무리 검소하게 한다 해도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돈이 없어 조상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그런 종가들도 꽤 있을 거예요. 우리 집안에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윤씨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답 등 재산이 많지만 그것을 잘 지킨 덕이라고 말했다. “1984년도에 조부님 명의로 돼 있는 재산 중 상당 부분을 종중 명의로 다 바꿔 놓았습니다. 집안의 재산을 공공화시킨 거지요. 그래야 누가 함부로 팔거나 쓰지 못할 거 아닙니까. 후대까지 멀리 보고 그렇게 한 거지요.”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에 윤씨는 “지난해 자본금 100억원을 들여 해남 윤씨 고산장학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윤씨는 종가의 살림살이를 물려받은 재산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인근 덕음산에서 다산 정약용이 산에 심어두었다던 차나무 종자를 얻어 16만5000㎡(5만여 평)의 다원(차밭)을 조성했다. 차를 재배하면서 그는 ‘해남다인회’라는 다도회를 만들었다. 매년 2000여 명의 전국 다인이 이곳 녹우당에 모여 차 문화상을 수여하는 행사를 열 정도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발전했다.

윤씨는 2남2녀를 두었다. 그중 큰아들 윤성철(44)씨에게 종손 준비를 시키고 있다. 큰아들은 고려대에서 중문학을 배우고 중국 베이징대에서 공부를 하다 얼마 전 귀국해 서울에서 살고 있다. “아들이 귀국한 뒤 일부러 다른 일을 못 하게 말렸어요. 2010년부터는 녹우당에 내려와 본격적으로 종손 공부를 해야 하니까요. 이제 슬슬 종손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입니다.” 윤씨가 30대 초반부터 종손 역할을 한 것에 비하면 늦은 것도 아니라고 했다.

윤씨는 “정계에 진출하지 말고 혹 인연이 닿아 벼슬자리에 오르더라도 그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는 고산 할아버님의 유언은 욕심을 버리고 자연 속에 파묻혀 종가를 지키는 후손들에게 언제까지 전해질 가르침으로 제례 때마다 마음속에 새긴다”고 말했다.
안채로 자리를 옮겼다. 볕이 드는 툇마루에서 윤씨의 부인이자 이 집안의 종부 김은수(72)씨가 설 때 쓸 제기와 놋그릇을 꺼내놓고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다과라도 좀 들고 가라”는 말로 손님을 맞았다.

종부 김씨는 본관은 김해고 고향은 경남 통영이다. 경상도 출신이 호남 명문가 종갓집 맏며느리가 된 것이다. 김씨는 고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시집온 후 3년 동안 종가에서 살림을 배웠다고 했다. 시집온 뒤 10년간 수첩에 메모를 해가며 종가 음식 만드는 법을 익혔다. 1년에도 수십 차례인 제사 덕에 그래도 빨리 익힌 편이란다.

윤씨는 종손 역할을 하면서 제사를 모시는 시간을 오전 1시에서 9시로 바꾸고 제사 횟수를 조정했다. 윤씨는 “원래 전통적으로 제사는 첫 닭이 우는 오전 1시에 시작하는데 참석한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시간을 앞당겼어요. 할아버지·할머니 제사를 함께 치릅니다. 횟수를 단축할 수 있고, 두 분이 함께 제사 음식을 드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 싶었어요.” 고산의 종가도 세상의 변화를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해남=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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