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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은 박물관으로 양력 제삿날에 개관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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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아침에 내린 함박눈이 고택의 기와 지붕에 아직도 고즈넉하게 쌓여 있었다. 16일 오후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오리 이원익 선생 종가였다. 고택을 둘러싼 돌담 대문은 ‘휴관’ 팻말과 함께 잠겨 있었다. 우선 알려준 대로 그 앞 충현문화재단 사무실로 들어섰다. 재단 건물은 종손 부부가 거주하는 살림집 건물과 한 담자락 안에 나란히 서 있다.

“종부 어른 계세요?”
“관장님요? 막 들어오셔서 안채에서 옷 갈아입고 계세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관장님’이란 호칭, 그래도 낯설다. 오리 선생의 13대 종부 함금자(69)씨는 좀 전에 돌담 너머로 본 충현박물관 관장이다. 종택과 오리 선생을 모셨던 충현서원 터 등 주변 유적들을 단장하고 유물 전시관을 더해 2003년 문을 연 사설 박물관이다. 유물 전시관을 운영하는 종가는 종종 있다. 그러나 이렇게 종택과 유적지 전체를 정식 박물관으로 만든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함 관장은 2년 전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종가박물관의 역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아 정식 학예사가 됐다. 지난해 12월엔 대한문화재청이 주관하는 2008년 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의 보존관리부문 대통령상도 받았다.“죄송해요. 웬만하면 한복을 입고 있으려 했는데, 서울에 다녀오느라 빙판길 때문에 긴장을 했더니 가슴이 답답하고 종아리가 너무 아파서….”

함 관장은 처음 연락했을 때 “취재할 게 없을 거예요. 전통은 지켜야 한다고 하는데 다 없앤 것 같아서…”라며 방문을 완곡히 거절했었다. 4대 조상에 대한 기제사는 상당한 재산가였던 증조부가 일본·미국 등에서 유학한 아들(조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두 없앴다고 한다. 그런데 한식과 추석 등에 지내던 묘제와 오리 선생의 불천위 제사마저 함 관장 때 없애거나 간소화한 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오리 선생 생신인 음력 10월 24일 새벽녘에 지내오던 불천위제는 2003년 10월 24일 충현박물관을 개관한 뒤 이듬해부터 양력 10월 24일로 옮겼다. 그것도 2006년부터는 오전 10시로 늦춰 주과포회만 영당에 올려 기념식을 겸한 제를 지낸다. 손님들에게 별도의 식사 대접도 하지 않는다.

함 관장이 제사를 줄일 수밖에 없던 상황을 설명했다. “제 대까지 대감 할아버지(오리 선생) 제사상만큼은 제대로 차리려고 며칠씩 밤을 새워 준비하곤 했는데 이젠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저도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해서 ‘장애인’이나 다름없고, 시집왔을 때만 해도 몇 명씩 와서 도와주던 일가 아주머니들도 이젠 다 연세가 70이 넘어요.”

현실적 결단이었다. 함 관장은 4대 독자인 종손 이승규(69·연세대 의대 명예교수)씨와의 사이에 아들만 넷을 뒀다. 그러나 더 이상 며느리들에게 자신과 같은 희생을 무작정 강요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함 관장은 그 연배의 종부로는 드물게 명문대 졸업생이다. 연세대 간호학과에 다니던 시절 남편을 만나 졸업 후 결혼했다. 전국 간호대생 모임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그는 결혼과 동시에 광명의 종택으로 들어가 몇 년을 살았다. 종부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종손 부부가 모두 세례교인인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함 관장은 “우리 부부는 제사를 우상숭배라 생각지 않는다. ‘조상에 대한 추모의 예’로 여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종교적 이유로 제사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며느리의 태도를 억지로 바꾸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괜히 지킬 수 없는 걸 지키려고 하기보다 대감 할아버지의 정신적 유지를 잇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어요. 남편이 산소들부터 정리한 것도 그런 의미죠.”

종손은 박물관의 운영 주체인 충현문화재단의 이사장이다. 이 이사장과 함께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오리 선생 묘를 찾았다. 하얀 눈꽃이 봄꽃의 화사함만은 못했지만 조경이나 관리가 제법 잘된 공원처럼 보였다. 80년대 초 경인고속도로 건설 때문에 이장 명령이 내려진 것을 계기로 이 이사장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7대조까지의 산소를 모두 오리 선생 묘 인근으로 옮겼다고 한다.

유골을 모두 화장해 석함에 모신 뒤 비석이 없던 묘들은 나란히 모아 가족묘 형식을 취했다. 유물 가치가 있는 비석 등이 있는 묘는 가묘를 만들었다. 이 이사장은 묘를 이장할 때 겪은 고충을 털어놨다. “외국의 공원묘처럼 꾸며 보려고 했죠. 물론 종중에선 난리가 났었어요. ‘선조 묘를 그렇게 해서 얼마나 잘되나 보자’는 악담도 많이 듣고…. 그런데 요즘엔 구경하고 가서 그런 식으로 만드는 지손들도 생겼죠.”

묘터 소유권을 놓고 종중과 소송에도 휘말렸다. 결국 이 이사장이 승소했다. 이 이사장은 “대감 할아버지 유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는 “이런 일(재산 다툼)이 생길 수 있다고 내다보셨는지 유서 마지막 부분에 ‘적자와 적손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토를 달지 말라’는 뜻을 밝혀 두 셨다”고 말했다.

그 후 묘터와 유적지 등은 모두 재단을 만들 때 기부했다. 사실 박물관 사업은 증조부가 마련해 둔 든든한 재산이 밑바탕이 됐다. 개관 준비에만 30억원가량 들었다. 의사인 한 아들에게서 “병원이나 지어주시지 뭐 하러 돈을 그렇게 쓰시느냐”는 볼멘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박물관을 관리하면서 매년 오리 선생 관련 유물이나 고서를 발굴해 연구하고 도록 등을 내는 데 연간 2억~3억원이 들어간다. 이자로도 운영이 될 수 있도록 기금을 만드는 게 종손 부부의 희망이다.

“다듬잇돌을 주제로 도록을 만들고 싶은데 마침 이번에 받은 대통령상 상금이 1000만원이나 되기에 좀 쓰마 했죠. 그런데 이이가 기금 종잣돈 만든다고 오늘 당장 재단에 입금시켰지 뭐예요.” 남편을 흘깃 쳐다보는 함 관장의 눈매엔, 그러나 흐뭇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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