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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⑭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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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못 역사적인 순간이었지만, 세간의 기대와 관심은 예상보다 낮았고, 일각에서는 무려 260억원이나 들인 ‘사상 최대의 우주쇼’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우주인 이소연의 건강 이상설과, 엄격한 보도 통제 등이 맞물리며 우주인 산업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다.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인식을 높인다’는 사업의 목표도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그것도 여성 우주인인 이소연이 갖는 의미와 상징성은 결코 작지 않다. 어렵사리 이소연을 만나 저간의 사정을 들었다.

우주인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소연은 진지하다. 3시간의 인터뷰가 끝날 즈음 눈물을 보일 듯 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 시련과 도전, 그리고 운명

이소연 박사의 말은 꾸밈이 없었다. 아침 9시에 만난 그녀는 화장기 하나 없었다. 몸짓이나 웃음에도 거리낌이 일절 없었다. 들은 대로 써도 될까 싶을 정도로 거침없이 말했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보여준 한국 첫 우주인이라는 자부심과 우리나라의 우주산업에 대한 진한 애정이 있어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이소연 박사가 사용한 소탈한 언어들을 굳이 대치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그대로 실었다. 그간의 여러 인터뷰에서 나온 ‘주례사 멘트’는 일부러 뺐다.

Q 우주인에 도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솔직히 KAIST에서 석사를 할 때까지는 청운의 꿈이 있었어요. 하지만 박사에서 발목이 잡혔어요. 마지막 박사과정에서 3년은커녕 4~5년이 지나도 졸업이 쉽지 않겠더라고요. 여기까지가 내 한계구나 하는 고민에 빠졌고 ‘왠지 내가 하는 일은 다 안 되는 것 같다’는 절망감이 들었어요.

Q 초등학교 이후 내리 달려오다가 박사과정에서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군요.

맞아요, 매너리즘. 심지어는 실험방법을 바꿔도 결과는 같았어요. 남들은 KAIST에 앉아만 있어도 부러울지 모르겠지만 저는 KAIST 내의 최종 결선에서 지고 있었던 셈이죠. ‘그야말로 되는 일 없는 재수 없는 애’라는 생각도 들고, 마음이 불안하니 출근해도 일이 손에 잡히질 않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창의성이 사라졌어요. 이때 우주인 공모를 접한 거죠.

Q 지도교수님이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때 교수님이 “이소연씨가 되겠어요? 정신 차리고 빨리 졸업이나 하지!”라고 하시는데 패배감이 장난이 아니었어요. 교수님으로서는 당연한 말씀이었지만 저로서는 이제 곧 끝날 테니까 돌아와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죠. 오죽하면 선배 중 하나가 “너 그러다 덥석 돼버리면 교수님 참 입장 곤란하시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2. 우주인 이소연

국제적으로 우주인에 대한 정의는 없다. 미국은 대기권 밖에서 80㎞ 이상을 비행할 경우에 인정하기도 하고, 러시아는 우주공간에서 수행할 임무와 관련한 훈련을 일정기간 이수하면 우주인 칭호를 준다. 우리나라는 무중력을 견디는 탑승뿐 아니라 임무수행 훈련을 소화하면 우주인으로 인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주인 이소연이나 예비우주인 고산씨 모두 우주인이라고 불러야 옳다.

Q 이소연씨가 우주인으로 최종 선발되기 전에 한 인터뷰가 유튜브나 인터넷 동영상으로 많이 떠돌고 있더군요?

저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주에 가는 것만을 생각했지 갔다오면…’ 이라는 것은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었어요. 정말 우주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좀 더 조심했을 테고 그런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겠죠. 당시만 해도 그냥 선발 과정의 경험과 느낌을 가볍게 얘기한 것이었죠.

(이소연씨의 인터뷰는 지인에 의해 이루어져 유튜브에 올려졌고, 여기서 ‘최초의 우주인이니 돈도 많이 벌고, 일부는 국가에 환원해서 기부도 하고…’라고 말한 대목이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당시 이소연씨의 입장과 자유롭고 즐거운 인터뷰 분위기를 감안하면 솔직하고, 오히려 꾸밈없이 건강한 내용이었다. 또 실제 상업적으로 기획된 우주인 프로그램에서 마치 성직자 지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위선을 떨 필요는 없는 것이다.)

Q 처음 우주인 후보였던 고산씨와 중간에 역할이 바뀌었는데, 고산씨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산이 오빠는 저와 성격이 너무 달랐어요. 저는 영어를 배워도 책보다는 어울려서 배워요. 모든 것을 실제로 부딪치며 배우는 사람이죠. 그런데 산이 오빠는 모든 공부를 마친 뒤 움직이는 스타일이에요. 굉장히 성실한 분이죠. 그러니 훈련과정의 스타일도 달랐어요. 거기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지만 내가 사회에서 평소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과는 스타일이 약간 달랐던 거죠. 러시아어도 산이 오빠는 할 말을 예습하고 가는 스타일이었고, 저는 같이 부딪쳐 술 마시고 놀면서 배우는 스타일이었죠.

Q 고산씨가 우주센터 내의 규칙을 어긴 것은 실제로 어떤 문제였습니까?

산이 오빠의 열정이었어요. 사실 그런 것들은 국가기밀도 아니고 누구나 다 접근 가능한 내용이었어요. 다만 규정상(officially) 그런 것뿐이었지 안에서는 모두들 서로 주고받는 수준의 문서였어요. 같은 실수도 상황에 따라 용인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처럼 예민한(critical) 실수나 잘못은 전혀 아니었어요. 일종의 사문화(死文化)된 규정이었죠.

Q 그래도 막상 탑승 우주인이 바뀌었을 때 이소연씨의 심경은 어떻던가요?

솔직히 바뀐다는 게 소문으로 끝나고 ‘그냥 이대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는데 왜 나를 흔드나’ 싶었어요. 저는 우주에 갔다오는 열흘보다 더 큰 일 년간의 훈련과 6개월간의 선발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쓰일 용도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당황스러울 뿐이었죠.

Q 고산씨와 그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나요?

산이 오빠는 목표를 정하면 성취를 하는 사람이에요. 저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노력파에 실력파였죠. 그래서 산이 오빠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어요. 저는 저대로 산이 오빠에게 내가 동료로 보일까라는 생각까지 했었어요. 이후에는 실제로 시간표가 달라 그 안에서 자주 만나지도 못했어요. 물론 서로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면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국내에 돌아온 지금도 그때 일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눌 타이밍을 아직 못 잡았어요.

Q 지구로 귀환할 때 문제가 있었는데, 그 안에서 두렵지 않던가요?

훈련 중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옵션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 희열이 더 컸어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은 대개 정상적으로 귀환했으니, 그런 걸 경험한 사람은 별로 없거든요. 귀환 때 내부 기압(G-force)이 3.5~4G여야 하는데 느낌에 좀 큰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그 순간 옆자리에 비행 엔지니어가 “제기랄(What the fuck)”이라고 하면서 “이건 최소 6~7G다” 라고 소리치더군요. 그 순간 바로 앞의 계기판에 불이 들어왔어요. 그것은 궤도를 벗어나서 다른 데로 간다는 의미였죠. 한데 저는 그 순간 ‘앗싸!’ 하는 희열이 들더군요.

Q 그런데 귀환 뒤 인터뷰에서는 “죽을 뻔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우리가 보통 계단에서 발을 삐끗해도 ‘아휴~ 죽을 뻔했어!’라고 하잖아요? 그런 느낌에서 한 발언이었죠. 저는 전혀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고 늘 말했거든요. 또 옆 우주인에 대한 믿음도 있었고요. 최소 우리 셋(선장과 비행엔지니어 포함)은 죽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밖에서는 걱정했다고 하더군요.

Q 의사 입장에서 추측건대 당시 모습을 보면 척추 압박 골절이나 최소 외상성 디스크 정도는 발생한 것처럼 보였는데, 왜 그렇게 건강 문제에 대해 극비 취급을 했나요?

원래 우주인의 건강상태는 일급 보안이에요. 건강에 미치는 영향들을 다음 우주선을 설계할 때 반영해요. 이 때문에 의무기록 자체가 노하우인 셈이거든요. 하지만 제 경우에는 인도적 차원에서 모든 의무기록을 넘겨줘야 했기 때문에 탑승 전후의 건강상태를 기록한 자료를 받은 것도 큰 수확이었죠.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공개해버리면 우리처럼 어렵게 우주인을 보내지 않은 나라들도 똑같이 자료를 공유하는 셈이 되죠. 그것이 기술 유출의 가장 큰 포인트였어요. ‘왜 아픈 것을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느냐?’ 이 말은 이게 얼마나 가치 있는 자료인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죠.

Q 여전히 건강 상태에 대한 직답은 안 하는데요. 러시아 측에서 그 귀한 의무기록을 내줄 정도라면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가 이소연씨에게 발생했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솔직하게 말씀드려 척추 물렁뼈가 좀 튀어 나온 정도였대요. 뼈를 다친 것은 아니고요. 안정과 치료를 통해 회복됐고, 지금은 아무 문제도 없어요.

(이것은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외상성 척추 디스크 팽륜증’이라고 볼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처럼 인체가 수직으로 충격받을 때 발생하는데, 보통은 휴식과 치료에 의해 회복된다.)

Q 그렇게 힘들게 우주인이 됐는데, 일부에서 ‘우주 관광객’ 혹은 ‘260억원짜리 이벤트’라는 식의 폄훼를 할 때의 심경은 어땠나요?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어요. 변명할수록 반박의 여지만 키우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상처가 상당히 커 보였다. 아무리 적극적인 성격이지만 목숨을 걸고 이뤄낸 일에 대해 이런저런 잡음이 일면서 마음고생이 컸던 것 같았다. 냉정하게 보면 이소연은 260억원짜리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아니라 260억원짜리 사업이 무너지지 않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발사체도 없이 우주인을 보낸 것에 대한 타당성 논쟁은 이소연에게 향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프로젝트를 기획한 사람들을 향했어야 마땅했다.)

3. 우주인 그 이후

그녀는 인터뷰 내내 우주인으로서의 위상과 자연인 이소연으로서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아 고민스러워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가진 태생적인 솔직함과 쾌활함은 한국 최초 우주인으로서의 입장에서는 어느새 불편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말과 표정에서 깊은 번민을 읽을 수 있었다.

Q 막상 우주인이 되고 난 뒤 허탈감을 느끼지는 않았나요?

일본 최초 우주인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일본 정부에서 공식적인 우주인을 띄우기 위해 그냥 묻어버린 거죠. 저는 그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달란트를 묻어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백번 이해해요. 그러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고민이 이해가 돼요.

(2001년 이후 민간 우주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로 논란이 일었다. 이 경우에는 보통 ‘우주비행 참여자’(spaceflight participant)로 부른다. 일본의 경우 1990년 도쿄방송의 아키야마 도요히로가 우주비행을 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를 정식 우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 우리나라도 허재민씨가 오라클 주최의 우주여행 상품권에 당첨돼 이소연씨보다 먼저 우주여행을 할 계획이었지만, 이 경우 역시 우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허재민씨는 ‘국가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우주여행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 문제는 민감한 이슈다.)

Q 이제 나이가 적지 않은데 애인이나 남자 친구는 없나요?

저는 내내 형님들이 많으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굳이 그중 하나를 남자로 택해 나머지 형들을 모두 잃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 거죠. 대학 내 동아리나 동문에서 연애를 하게 되면 남자 친구를 얻는 게 아니라 동료를 잃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다 장가를 가버렸더라고요… 하하.

Q 어쨌건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요?

일단 공부를 더 해야겠죠. 박사 하면서 제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배웠어요. 학부 때는 기계에 대해 프라이드가 있었는데 석·박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거죠. 내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제 물 아래에 있는 큰 덩어리를 알아가야 하는 시기가 온 거죠.

Q 그럼 요즘 다시 전공 공부나 우주 연구에 주력하고 있나요?

아뇨. 벌써 6개월째 강연과 행사에 참석하고 있어요. 내가 점점 비어가는 느낌이에요. 솔직히 내실 없는 허상으로 소모되는 게 안타까운 심정도 있죠. 경험을 공유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내년에 먹을 씨앗까지 먹어버리면 씨를 다시 뿌려야 할 때 종자가 없잖아요. 지금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종자를 남기든 말든 관심이 없죠. 내 스스로 좋은 종자와 좋은 열매를 만들어야 하는 숙제가 있어요.

(그녀의 강연은 보통 하루에 2개, 많을 때는 한 주에 12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주 관련 행사 참석까지 일정이 빼곡하다. 국민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유발한다는 측면에서 당연할 수 있으나 선진 우주기술을 하루빨리 익히고 배운 것을 우리 우주기술에 녹여낸다는 더 큰 목표에서는 그만큼 멀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Q 지금 소속은 항공우주연구원이고 신분은 우주연구원의 연구원 신분인가요?

2년간은 옵션이죠. 최소한의 임무예요. 그 뒤에는 고민이 필요해요. 솔직히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거기보다 편한 데도 없어요. 요즘 시기에 매달 확실하게 월급 받는 직장이 어디 있나요? 저보다 우수한 친구도 지금 취직하기가 쉽지 않아요. 우주인이라고 더 좋은 대우를 할 이유도 없고 실제 특별대우도 해주지 않아요. 하지만 강연은 일종의 약속이죠. 우주인이 된 대가로 보상(payback)에 대한 의무감도 있고 그런 것이 지금 강연과 행사를 통해 제가 작은 기여를 하는 것이죠.

Q 그럼 전공 공부에서는 좀 무리가 따를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박사과정 마치고 졸업할 때 우주인이 되는 바람에 심사에 통과하게 된 거라고 하는 이들이 있었어요. 나는 5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는데 박사를 그렇게 딴 걸로 치부해 버리는 거죠. 내 청춘을 태운 공부는 아무것도 아니고 우주인이 된 것이 박사를 만들었다는 거죠. KAIST 사람들까지 그렇게 말하기도 했어요. 야속하지만 도리가 없죠. 물론 저는 연구개발에서 노벨상을 탈 인재는 아니에요. 하지만 과학기술의 꿈을 전파하는 조경철 박사 같은 분이 됐으면 좋겠어요.

Q 조경철 박사와 같은 역할이라면 그분의 학문적 업적 말고도 일종의 과학멘토 같은 역할을 말씀하시나요?

그렇죠. 사실 이게 상당히 중요한데 우리 학계에서는 변절자 취급을 해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어야 새로 연구하려는 사람이 생기죠.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내는 논문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논문을 못 올려도 사회에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나 연구도 많아요. 제 박사논문이 세계를 흔들 수는 없겠지만 박사학위에 이르는 공부와 우주인의 경험을 연결고리로 그런 역할을 하자는 생각을 갖는 거죠.

(실제 이소연이라면 그 역할에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는 강연과 행사 등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중에게 과학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 두 가지 역할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 그녀의 당면 과제일지 모른다.)

Q 조경철 박사와 같은 과학 전도사나 멘토가 되는 것 외에 우주인으로서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꿈은 없나요?

10년쯤 뒤 방송국 다큐멘터리 팀이 저를 한번 찾아오지 않을까요? ‘우주인 이후 10년’이라는 제목 정도를 들고요. 하지만 그때 저는 무엇이 돼 있을지 모르죠. 우리나라 우주산업에 투자가 늘어나고 저도 거기서 무엇인가 열심히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애를 키우는 평범한 엄마가 돼 있을지도 모르죠.

Q 그 말은 우주과학에 대한 반짝 관심 이후에 실질적인 지원이 부족한 데 대한 아쉬움을 담은 것 같은데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서 저도 확실한 자신이 없어요. 아무리 과거에 잘나가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면 그리 된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죠. 일부 친구들은 “네가 이 시대의 희생자다, 너를 이 자리에 가져다 놓고 유린하는 거다”라고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해요. 멀리서 보는 유명한 이소연은 대박의 기회를 잡은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겐 200억 이벤트의 희생양으로 비칠 수도 있는 거죠.

(이소연의 이 말에는 우주과학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시류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우려대로 만약 이 지점에서 우주기술에 대한 투자가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주인 이소연은 정말 260억원짜리 이벤트의 주인공에 그칠 수도 있는 것이다.)

Q 우주인이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나요?

후회, 왜 없겠어요. 갔다 와서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이런 후폭풍이 있을 줄 알았다면 과연 시작했을까? 후회도 들죠. 저는 앞으로 우주산업이 최소 일본 수준으로 따라 갈 줄 알았어요. 일본도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요. 그런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그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 제 임무겠죠? 국민들이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과학기술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하는 멋진 수단이 되는 거죠. ‘저는 없는 손금을 그려서라도 운명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에요!’

마치며

한 열정적인 과학도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융합학문인 ‘바이오시스템학과’ 최초의 박사 신입생에서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바뀐 그녀의 발걸음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 이었는지 모른다.

경제위기로 새해 벽두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시기에 ‘손금을 그려서라도 운명을 바꾸겠다’는 이소연의 결기 어린 한마디가 만만찮은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이소연은 태극마크를 단 우주선이 우주를 날 수 있는 디딤돌을 놓았다. 위기에 빠진 우리 경제도 ‘온 국민이 손금을 그려서라도’ 다시 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으며 그녀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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