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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자신들의 적을 백성의 적으로 기록한 ‘붓의 권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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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객관적 사실(fact)과 주관적 의견(opinion)은 다르다. 그러나 세상에는 늘 의견을 사실로 만들려는 세력이 존재해왔다. 의견을 생산해 사실처럼 유통시키려면 권력과 기구가 필요하다.

대중들은 때로 여기에 속아 오인하지만 대부분 곧 진실이 드러난다. 때로는 의견이 수백 년간이나 사실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연산군이 그런 경우다.

연산군이 이궁(離宮)을 세우려 했던 장의문(藏義門) 밖 장의사 터의 당간지주. 지금의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자리다. 사진가 권태균


『연산군일기』는 사실(fact)을 기술한 부분과 사관(史官)의 의견(opinion)을 개진한 부분을 분리해서 읽지 않으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사관의 의견을 사실로 읽다 보면 사관의 의도대로 연산군을 해석하게 된다. 연산군은 국왕과 사대부가 공동 통치한다는 신흥사대부들의 건국이념을 부정했다. 연산군이 사대부 계급의 공동의 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산군은 백성들에 대해서도 폭군이었는가?

사관은 백성들에게도 폭군이었다고 비판한다. 중종 즉위일 『중종실록』은 “사신은 말한다(史臣曰)”라면서 “사직북동(社稷北洞)에서 흥인문(興仁門:동대문)까지 인가를 모두 철거하여 표를 세우고, 인왕점(仁王岾)에서 동쪽으로 타락산(駝駱山)까지 민정(民丁:백성)을 많이 징발하여 높은 석성(石城)을 쌓았다(『중종실록』1년 9월 2일)”라며 민가 철거를 폭정의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연산군은 실제로 민가를 철거했다. 그는 재위 9년(1503) 11월 승지들에게, “궁궐 담장 아래 100척(尺) 내에 집을 짓는 것은 법에서 금하고 있으므로, 법을 어기고 집을 지은 것에 대해 해당 관사에서 보고해야 하는데 아뢰지 않는 것은 원래부터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철거 대상은 국법에서 주택 건축을 금하고 있는 궁궐 담장 아래 100척 이내, 즉 30m 이내의 주택들이었다. 게다가 강제 철거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먼저 병조·공조·한성부의 당상관(堂上官)을 보내 ‘집 주인들을 모아 철거의 뜻을 효유’시켰다. 담당 부서의 고위직들이 먼저 설득작업에 나서게 한 것이다. 게다가 연산군은 “철거되는 사람들에게 비록 넉넉히 주지는 못하지만 면포(綿布:무명)를 조금씩 나눠주어 나라의 뜻을 알게 하라”라고 명했다. 병조판서 강귀손(姜龜孫)은 이 명에 따라 철거 대상 주택을 4등급으로 나누어, “큰집(大家)에는 무명 50필, 중간집(中家)에는 30필, 작은집(小家)에는 15필, 아주 작은집(小小家)에는 10필씩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보상책을 보고했다.

철거대상은 11월 6일 사헌부 장령 이맥(李陌)이, “대궐을 내려다보는 집은 마땅히 철거해야 하지만 그중 오래된 집들도 함께 철거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대궐을 내려다보는 높은 위치에 있는 불법 주택들이었다. 사신은 이에 대해 연산군이 후원에서 나인들과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백성들이 알까 염려해서 “산 아래 인가를 헐기에 이르렀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철거한 창덕궁 후원 동쪽 인가들과 성종의 후궁들이 거주하는 자수궁(慈壽宮)과 수성궁(壽成宮) 부근,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불법 주택들은 철거할 만한 사유가 있는 주택들이었다. 연산군은 “궁궐 담 밖의 집 건축은 법으로 금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법을 돌아보지 않고 집을 지었으니 마땅히 법으로 논하여야 할 것이지만 지금 도리어 빈 땅을 떼어 주었다”라고 대토(代土)까지 마련해 주었다. 게다가 “집을 비운 백성들이 편하게 거주할 곳(安接處)을 마련해 아뢰어라”라고 명해서 한성 판윤(判尹:시장) 박숭질(朴崇質)이 “도성 안의 경저(京邸)나 빈 집을 원하는 대로 빌려 거주하게 하려는데, 만일 빌리려고 하지 않으면 관에서 독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책을 보고했다.

경저란 지방의 경저리(京邸吏)가 머물던 지방관아의 서울 출장소였다. 연산군은 또한 “심한 추위에 의지할 곳이 없다 해서 봄까지 기다려 철거하게 했으니 역시 혜택을 많이 받은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 일정액의 보상금과 대토, 거주지를 마련해 주고 봄까지 철거를 연기한 것을 폭정(暴政)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래도 대간에서 계속 반대하자 연산군은 속내를 드러냈다. “집을 헐리고 원망하며 근심하는 심정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리를 아는 조사(朝士:벼슬아치)들도 법을 범하면서 집을 지은 자가 많으니 헌부(憲府:사헌부)에서 당연히 죄주기를 청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도리어 말을 하는 것이냐?(『연산군일기』9년 11월 9일)” 사헌부가 백성들을 빙자하지만 속으론 벼슬아치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연산군의 민가 철거는 백성들보다는 벼슬아치들에게 더 큰 타격이었다.

『중종실록』의 사신(史臣)은 또 “광주(廣州)·양주(楊州)·고양(高陽)·양천(陽川)·파주(坡州) 등의 읍을 혁파하고 백성들을 모두 쫓아내어 내수사(內需司)의 노비가 살게 했다(중종 1년 9월 2일)”라고 비난했다. 『연산군일기』10년(1504) 4월조는 지언(池彦)·이오을(李吾乙)·미장수(未長守) 등이 ‘위에 관계되는 불경한 말’을 한 사건이 발생하자 다섯 고을을 혁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 년 후인 11년 7월 광주 판관(光州判官) 최인수(崔仁壽)를 파직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을 보면 다섯 고을 혁파는 엄포였든지 일시적 조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관은 또 연산군이 이궁(離宮:행궁)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비난하고 있다. 재위 11년 7월 연산군은 “장의문(藏義門) 밖이 산과 물이 다 좋아 한 조각 절경이므로, 금표(禁標)를 세우고 이궁 수십 칸을 지어 잠시 쉬는 곳으로 삼고자 하니, 의정부와 의논하여 지형을 그려서 바치라”라고 지시했다. 영의정 유순 등은 즉각 “상의 분부가 윤당하십니다”라고 찬성했으나, 사관은 “이로부터 동북으로 광주·양주·포천·영평에서, 서남으로는 파주·고양·양천·금천·과천·통진·김포 등에 이르는 땅에서 주민 500여 호를 모두 내보내고, 내수사의 노자(奴子)를 옮겨서 채우고, 네 모퉁이에 금표를 세우고,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죽여서 시신을 구경시킴)를 하니 초부·목동의 길이 끊겼다.(『연산군일기』 11년 7월 1일)”라고 비판했다. 동북 4고을, 서남 7고을 등 모두 11고을의 백성을 내쫓은 듯이 비판했지만 그 숫자는 모두 500여 호에 불과했다.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양주 한 고을의 호수(戶數)만 1만1300여 호에 인구는 5만2000여 명이라고 전한다. 11고을의 이름을 모두 든 것은 마치 이 백성들이 모두 내쫓긴 것처럼 호도하려는 사관의 의도였다.

그해 7월 22일 연산군은 추석을 앞두고, “이제부터 모든 속절(俗節:명절)에는 금표 안에 무덤이 있는 자에게 2일을 한하여 제사 지내러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되 마구 다니지는 못하게 하라”라고 명절 출입을 허용했다.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했다는 것도 사관의 과장이다. 궁궐 근처 불법 가옥들도 보상해준 연산군이 이궁 건축 예정지 안의 민가에 보상해주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이궁을 설치하려 한 이유에 대해 연산군은 “무신년(성종 29년)에 대비께서 편찮으셔서 부득이 인가로 피어(避御)하셨으니 어찌 국가의 체모에 합당하겠는가?”라면서 “궐내에 온역(瘟疫:전염병)이라도 발생하면 옮겨 거처할 곳이 있어야 하고 또 사대부일지라도 집 몇 채를 가졌거늘 하물며 한 나라의 임금이 어찌 별궁(別宮)을 만들 수 없겠는가?(『연산군일기』 10년 7월 28일)”라고 말했다.

또한 “경궁·요대(瓊宮·瑤臺:구슬 등을 박은 화려한 궁궐)를 만든다면 옳지 않으나, 이는 부득이한 바이다”라고도 말했다. 이때 만들려던 이궁의 규모는 ‘큰 집 50칸(大家五十間)’이었으니 99칸 민간 부호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소박한 궁이었다. 이때 예정된 이궁 터가 장의문 밖 장의사(藏義寺) 터인데, 지금의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자리다.

그러나 연산군은 끝내 50칸짜리 이궁도 짓지 못했지만 11고을 백성들을 다 내몰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연산군은 백성들에게 성군(聖君)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관의 비난처럼 폭군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백성들의 굶주린 기색을 깊이 근심하고/임금(上)을 능멸하는 풍속을 통한한다/때로 진실한 충성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매일 가짜 충성을 막으리라 생각한다(深病民有飢色, 痛恨凌上風俗, 時思欲見其實忠, 日念使杜其詐誠)(『연산군일기』 6년 8월 11일)”라는 어제시(御製詩)를 썼다. 연산군은 백성들의 굶주린 기색을 근심하고 사대부들이 ‘임금을 능멸하는 풍속’을 통한하고 가짜 충성을 경계했다. 그 결과 연산군은 붓을 잡고 있는 사대부들에게 희대의 폭군으로 몰린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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