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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아버지, 누구인가?…가난한 농사꾼에서 거제도 갑부까지 ⑦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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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부터 김대중·김영삼·전두환·노무현 전 대통령.

월간중앙 지난 9월30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친인 김홍조 옹의 장례식이 경남 거제도에서 열렸다. 상가에는 내로라 하는 거물 정치인이 줄을 이어 때아닌 ‘문상정치’가 이뤄졌다. 대통령을 만든 아버지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대통령의 아버지와 관련한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한다.

7. 노무현 대통령의 아버지, 노판석─ 온순하고 조용한 무골호인형 #8. 이명박 대통령의 아버지, 이충우─ 가족보다 남을 더 생각한 의인형

#장면1 아버지는 아들 승룡(承龍)에게 족보를 수북이 내놓으며 달달 외우라고 엄명했다. 난해한 족보 공부는 죽기보다 싫었다. 아들은 처음에는 싫었지만 읽다 보니 점차 가문에 대한 자긍심도 생기고 가부장적 권위도 갖게 되었다. 승룡은 훗날 이승만 대통령이다.

#장면2 배가 침몰했다. 모두 가족을 구하느라 아우성쳤다.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는 가족보다 다른 사람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아버지는 평생 우직하게 일만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가사는 아내가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아버지였다.

권력자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국가를 이끌어가는 최고지도자에게 아버지가 차지하는 심리적 공간은 어느 정도일까? 프로이트(Freud)나 융(Jung) 같은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아버지는 모든 인간의 뇌리 속의 ‘영원한 권위체(權威體)’로서 아들의 성격과 리더십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전쟁영웅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이 세계를 정복하고, 히틀러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심리 저변에도 아버지의 짙은 그림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대체로 아들에게 ‘남성적 세계관’과 함께 강인한 의지와 투지, 권력의지를 심어주는가 하면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컨대 어린 히틀러는 포악한 성격의 아버지가 만취한 상태에서 어머니를 폭행하고 강제로 범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남성에 대한 적개심, 나아가 인간에 대한 공격 욕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국무부 보고서의 내용 일부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 험난한 정치역정을 헤쳐나가 권력을 잡고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지금껏 어머니에게 포커스가 집중된 탓에 아버지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가려 있었지만, 리더십에서 아버지라는 변수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국가지도자의 성장 과정은 성격을 형성하고, 성격은 리더십을 형성해 국정운영 곳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최근 대통령의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게 만든 계기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버지 김홍조 옹의 별세다. 김홍조 옹은 지난 9월30일 97세의 나이로 별세했는데, 거제도의 상가에 내로라 하는 거물 정치인이 줄을 이어 때아닌 ‘문상정치’가 이뤄졌다. 문상객이 어찌나 많았던지 거제도 일대의 화환이 동나고, 인근 꽃가게 주인들이 모처럼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아버지 콤플렉스의 양면성

아버지 김홍조 옹은 아들인 김영삼 대통령이 26세에 처음 국회의원 배지를 단 이래 60여 년 정치를 하는 동안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아마 아버지 김홍조 옹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 정치인 김영삼은 없었을지 모른다.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한눈 팔지 않고 정치인의 외길을 달려간 데는 지방 재력가였던 아버지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보면 대체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상대적으로 어머니와 아버지 가운데 어느 한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경우로 나뉜다. 굳이 분류하자면 이승만·노태우·김영삼·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반면 박정희·전두환·김대중 대통령은 어머니 못지않게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리학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 감정적이고 정이 많으며 변화무쌍한 감성적 세계관을 갖기 쉽다. 반대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 냉철하고 엄격하며 강직한 이성적 세계관을 갖게 마련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들에게 ‘동일시(identification)’의 대상이다.

아버지를 좋아하거나 반대로 싫어하면서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것이 동일시 이론이다. 예컨대 아버지가 엄할 경우 그런 모습을 싫어하면서도 아들은 자기도 모르게 엄격한 태도를 닮아간다. 그러면서 기필코 아버지를 능가하고야 말겠다는 극복 심리를 품기도 한다. 일종의 아버지 콤플렉스인 셈이다.

그런데 아버지 콤플렉스에는 양면성이 있다. 즉, 아버지가 지나치게 똑똑하거나 위압적이면 그 기세에 눌려 아들은 열등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 위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아들은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반드시 앞지르고야 말겠다’는 극복 의지를 품게 된다. 이에는 박정희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이 해당할 것이다.

반대로 아버지가 무기력한 존재였을 경우 그 초라함을 느낀 아들은 한사코 아버지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또 다른 열등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발견된다. 두 대통령의 자서전을 보면, 어머니의 존재는 큰 반면 아버지의 존재는 왜소하기 짝이 없다.

노 대통령이나 이 대통령은 공사석에서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종종 했지만, 아버지에 대해 언급한 적은 드물다. 그만큼 이들의 뇌리 속에 드리운 아버지의 그림자는 미미하지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이제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삶과 그것이 미친 심리적 영향을 간략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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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노무현 대통령의 아버지,
노판석─ 온순하고 조용한 무골호인형

노무현 대통령의 성장 과정에서는 어머니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아버지가 차지하는 공간은 협소하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야무지고 말 잘하는 ‘똑순이’로 집안살림을 책임진 데 비해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노판석 씨 집안이 봉하마을에 뿌리내린 것은 8대째라고 한다.

광주 노씨인 노판석 씨의 조상은 조선시대에 제법 높은 관직을 지냈으나 임금의 오해를 받고 경상도에서 은거생활을 하다 봉하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일종의 유배 후손인 셈이다. 노판석 씨는 아내와 함께 야산 돌밭을 개간한 산기슭에 고구마를 심어 겨우 입에 풀칠을 했고, 영세민 취로사업장에서 일한 대가로 주는 밀가루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온순하며 자상한 성격에 무골호인형(無骨好人型)이어서 모질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3년간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힘겹게 번 돈을 동네사람에게 몽땅 사기당한 후 아내의 구박을 받으며 무기력하게 살아갔다. 집안의 주도권이 어머니에게 넘어가는 결정적 계기였다. 노 대통령에게는 아버지 대신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한 맏형 노영현 씨가 있었다.

영현 씨는 당시 진영읍을 통틀어 유일하게 대학(부산대 법대)을 다닌 엘리트로서 부모가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논밭을 팔아 학비를 댈 정도로 집안의 희망이었고, 어린 노무현에게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이자 우상이었다. 그런 맏형은 사법고시에 번번이 낙방하다 중도포기하고 오랫동안 실업자생활을 했고, 결혼 뒤 아내의 구박을 받더니 1973년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훗날 노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형의 죽음 이후 마음속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로 가득 찼다”고 술회하는 것을 보면, 형제 관계의 트라우마가 보통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기력한 아버지의 왜소한 입지와 대리인이었던 맏형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강인한 어머니의 영향은 어린 노무현에게 감성적 세계관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적으로 유소년기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 감정이 풍부하고 즉흥적이며 때로는 격정적인 경향이 두드러진 감성적 세계관을 갖기 쉽다. 훗날 노 대통령의 열정적이고 튀는 정치인 기질과 국정운영 스타일에서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지만 3당합당 거부, 코드 인사와 같이 외곬으로 밀고 나가는 면에서는 우직한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8. 이명박 대통령의 아버지, 이충우
─ 가족보다 남을 더 생각한 의인형

이명박 대통령의 삶에서 아버지가 차지하는 공간은 어머니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예 <어머니>라는 제목의 책이 따로 출판되었고 대부분의 자서전이나 일화, 언론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면 아버지는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이는 어머니의 생활력이 워낙 강해 집안의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 이충우 씨는 경북 영일군의 가난한 농사꾼 출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친구 몇 명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떠나 오사카(大阪) 근교에서 소젖을 짜고 목초를 베는 목부(牧夫)로 일했다. 고향에서의 머슴살이보다 힘들고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어느 정도 저축할 만큼 돈을 벌자 잠시 한국으로 나와 결혼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6남매를 낳았다.

이후 10여 년간 일본에서 살다 해방되자 1945년 11월 가족과 함께 귀국선에 올랐다. 이때 당시 네 살이었던 이명박에게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8명의 가족이 임시 귀국선을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항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오던 중 대마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짐을 모조리 바닷속에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고향 땅을 밟은 것이다. 다행히 희생자가 없었던 것에 만족해야 했다.

지금도 이명박 대통령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배가 침몰한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아버지가 가족을 챙기기보다 배 위의 질서를 잡으며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정신이 강했지만 어찌 보면 가족은 소홀히 하고 융통성이 부족한 측면도 있었다. 그런 아버지였으니 가난은 나날이 심해졌고, 가족의 생활권은 자연히 어머니에게 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영덕·홍해·한강·곡강 등 포항 인근 장터를 돌며 옷감을 팔았지만 신통찮았다. 아버지는 28세 때 목사와 크게 언쟁을 벌인 뒤 한동안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다시 신앙생활을 재개했다. 1981년 뒤늦게 세례를 받았는데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서전 등을 통해 잘 알려진 이명박 대통령의 어머니는 매일 새벽 4~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자식들을 줄줄이 앉혀놓고 기도를 올렸다.

뻥튀기·국화빵 장사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이 대통령은 어머니로부터 부지런함, 열정, 장사 수완 등을 물려받아 오늘날의 성공 신화를 이룩한 데 비해 아버지로부터는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뚝심을 물려받은 것 같다. 이 대통령의 ‘얼리 버드’나 ‘컴도저’ 기질은 주로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존재가 왜소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아버지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 아버지에 대해 말하기를 가급적 꺼리고 심지어 숨기려는 심리 상태로, 이는 ‘나는 아버지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야 말겠다’는 상승 욕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심리학자 아들러(Adler)에 의하면, 콤플렉스는 열등감도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기발전의 촉매가 되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대통령이 온갖 난관을 뚫고 권력의 정상에 오르고, 이후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까지 아버지의 존재는 보이지 않게 심리적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이 훗날 아들의 리더십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은 아들의 성공을 위해 언행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글■최진

고려대 법대 및 동 대학원 행정학 박사. 청와대 정책비서실 국장,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정책홍보실장. 고려대 행정학 연구교수, 한국행정학회 이사. (현)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사단법인 한국리더십개발원 원장, 경희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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