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공권력이 심판하는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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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판정을 받은 장정일씨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마침내 사법처리 대상이 돼 13일 책임자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기에 이르렀다.이에 앞서 외국문학 전문 출판 사로 문학전문계간지인 『문학정신』과 『외국문학』을 펴내온 열음사라는 출판사는 번역소설 두권을 출간했다가 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음란」판정을 받아 아예 출판사 등록을 취소당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사법처리는 소설이 출간된지 겨우 한달을 갓 넘었을 뿐인 시점에서 이뤄진 것이다.열음사가 출판사 등록을 취소당한 것도 소설이 출간된지 두달이 채 안된 시점에서 일어난 것이다.
마치 군사작전을 보는 듯한 전격적이고 극히 단순한 대응이 아닐 수 없다.온국민의 공분을 샀던 그 어떤 거대비리에 대해서도공권력이 이처럼 빠르게,그리고 단호히 대응했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부의 이같은 발빠르고 강력한 대응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도적지 않을 것이다.성풍속이 갈수록 문란해지고 있고 그것을 부채질하는 환경속에는 영상물이나 출판물도 한몫 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다.이런 미디어가 성풍속을 문란케 하는 주 요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는지 몰라도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점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에 대응하는 자세와 방법이다.시비 대상이 된소설에 외설적인 표현이 넘치는 것만은 누가 봐도 분명하다.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성에 관한 소재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적인 주지(主旨)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나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속의 성에 관한 소재와 표현들이 양적.질적인 면에서 작가가 주장하고 있는 그런 주지를 파묻히게 할 만큼 압도적임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작가가 답변해줘야 한다.그러나 그 답변은 우선 독자나 문단에 대해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그런데도 그보다 먼저 검사에게 해야 하는 현실이 빚어진 것은 우리사회의 문화적 후진성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출판사도 엄연히 문화기관의 하나며 그중에서도 열음사와 김영사라면 나름대로 사회적 인정과 명성을 얻은 출판사다.그런 출판사가 낸 책이라면,더구나 그것이 문학작품임을 표방하고 있다면 일단 문학동네의 평판에 맡겨 1차적으로 그곳에서 시 시비비나 평가가 이뤄지게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다.혹시 두 출판사가 문제가 된 소설을 출간한 것이 일반의 성적 호기심을 이용하려는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할 수는있다.그렇다 하더라도 문화계의 문화적 문제에 공권력이 즉각 칼을 빼고 나서는 것은 성급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외설여부로 논란을 빚은 소설로는 마광수(馬光洙)씨의 『즐거운사라』가 있지만 그때도 이번처럼 공권력이 즉각적인 개입은 하지않았다.馬씨가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89년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수필집 출간때부터였고 그때부터 문단과 학원 안팎에서 줄기찬 논의가 진행된 끝에 92년 10월에야 검찰이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검찰은 이제 외설문제에 관해서는 문학평론가 이상의 노하우라도 쌓았다는 말인가.
미국의 대법원이 정립해 세계적인 기준이 된 표현의 자유에 관한 제재기준은 「명백하고 현존하며 절박한 위험(clear,present and imminent danger)」이라는 것이다.표현의 자유가 아무리 귀중한 기본적 인권이라고 해도 공동체에명백하고 절박한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에는 다수를 위해 제한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명백하고 현존하며 절박할 때」에 한한다는 것이다.처음에 미국 대법원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만을제한의 기준으로 설정했다가 뒤에 제한의 범위를 더 좁히기 위해여기에 「절박한」이란 형용사를 추가했다.
이 기준을 장정일씨의 소설에 적용해보면 어떤가.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려하는대로 설사 문제의 소설이 현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에 충격을 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은 있다고 해도 문단의 평가도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절박했다」고 말 할 수 있을것인가.더구나 물의가 일자 출판사측이 배포중지및 회수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강요된 침묵」보다는 「토론을 통해 허위와 오류를 드러내고 해악을 회피할 수 있는 더 자유로운 언론의 보장」이 문제해결의길이라는게 미국 대법원의 결론이다.공권력은 최후의 안전판이어야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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