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목소리 무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1970년 미국에서 흐루쇼프의 회고록(『흐루쇼프는 기억한다』)이 출간되자 곧바로 진위 논란이 일었다. 흐루쇼프가 64년 소련 공산당 제1서기에서 실각한 뒤 5년간 은밀히 녹음해 온 테이프를 입수했다는 게 출판사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가택연금 상태에서 KGB의 감시를 받던 그의 육성 테이프가 철의 장막을 뚫고 유출될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조작설까지 나왔다. 논란은 목소리의 무늬, 즉 성문(聲紋)을 분석함으로써 종식됐다. 해당 테이프의 음성과 60년 흐루쇼프의 유엔총회 연설 녹음을 비교한 결과 성문이 일치한 것이다.

성문이란 목소리의 고저와 음량, 공명을 나타내는 주파수를 시각적으로 표시한 것을 말한다. 사람의 지문처럼 누구나 독특한 특징을 나타낸다. 성문 분석 장치는 63년 벨연구소의 로렌스 커스타에 의해 개발됐다. 그는 5만 명의 목소리를 녹음·분석해 사람마다 성문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직업 성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낸다 해도 성문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오늘날 성문 분석은 개인 식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도구로 자리 잡았다. 2001년 오사마 빈 라덴의 메시지를 담은 육성 테이프가 방영됐을 때도, 2003년 이라크에서 잠적 중이던 사담 후세인의 육성 테이프가 방영됐을 때도, CIA는 성문 분석을 통해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몇 달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둘러싸고 갖가지 추측이 나돌고 있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 시게무라 도시미츠 교수(와세다대)가 제기한 사망설이다. 그는 지난여름 『김정일의 정체』란 책을 내고 “김정일은 2003년 사망했으며 그 후엔 대역이 진짜처럼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2년과 2004년 북·일 정상회담의 김정일 위원장 성문이 완전히 달랐다”는 근거를 대고 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여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우리도 2000년과 2007년의 남북 정상회담 녹음이 있기 때문이다. 두 시기의 김 위원장 성문을 분석하면 사실은 간단히 확인된다. 그리고 보니 19일 인터넷에 퍼져나갔던 ‘김정일 사망설’ 가짜 기사가 생각난다. 눈길을 끌고 조회 수를 올려보려는 낚시질에 불과했다. 『김정일의 정체』란 책이 낚시질이라면 일본의 소위 ‘한반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조현욱 논설위원

[J-HOT]

▶ 석탄·가스를 석유로 바꾸는 '마술'에 세계가 반해

▶ 탤런트 박상원 "난 빚쟁이, 갚을 궁리하다…" ^^;

▶ "이게 얼마만이냐" 인터뷰 요청 쇄도에 昌 즐거운 비명

▶ [도올고함] "환율 조작에 쓸 달러 있다면 차라리 北에"

▶ 얼핏 봐선 명품 핸드백, 속살은 노트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