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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네덜란드 잇는 유학 길잡이로 나섰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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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는 숨기지도 않았지만, 굳이 내세우지도 않았다. 입양아 출신이라는 것 말이다. 상처가 됐을 법도 한 과거를 담담하게 회고했다. “나는 100% 네덜란드인”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지만, 한국에 관심과 애정이 상당하다는 것도 고스란히 드러냈다.

네덜란드 교육 지원 사무소 (Neso)의 한국 사무소장. 은미 포스트마(35·사진)의 이야기다.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Neso는 네덜란드서 공부하려는 외국 학생들을 위해 대학 정보를 알려주고, 유학을 돕는 일을 한다. 네덜란드 정부의 지원을 받는 비영리 기관이다. 한국 유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이달 말 서울에 문을 열 예정이다.

“두 나라의 연결고리가 되어 봉사하고 싶었어요. 양쪽에서의 경험이 남다른 저라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보·나노 공학이 유명한 한국과 디자인·경영학이 앞선 네덜란드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교류하길 바랍니다.”

포스트마는 6살 때 남동생과 함께 파란 눈의 새 부모를 만났다. 그 전의 일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때 이미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멀리 갈 수밖에 없다는 걸 느낌으로 알아차렸다고 한다. 입양 뒤에는 남에게 끌려가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아왔다.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기자가 됐다. 워낙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세상에 호기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네덜란드에서 3년을 일하고, 일부러 한국에 올 계기를 만들었다. 2003년부터 1년 반 동안 일간지 ‘트로우’와 ‘라디오 네덜란드’의 한국 특파원으로 일했다. 2002년 그는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언론상인 베를린 ‘프릭스 유럽’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받았다. 제목은 ‘엄마와 마마’였다.

2005년 네덜란드로 돌아가 교육부의 법률 고문이 됐다. 법안의 추진부터 공표까지 모든 일을 관장하는 업무였다. 남들이 부러워할 자리였고, 얻는 데 운도 따랐다. 로펌 경험보다 기자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은 덕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인터넷에서 Neso 한국사무소의 채용 공고가 뜨자 마음이 움직였다. ‘한국’이 다시 머릿속에 맴돌았다. 면접을 보고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합격 전화를 받았다.

“막상 되고나니 결정하기 힘들었어요. 암스테르담에 좋은 집까지 마련하고 모든 게 안정된 상태였으니까요. 하지만, 늘 역동적인 한국은 매력적인 곳이에요. 이번 일도 그래서 신선한 도전으로 느껴졌죠.”

다시 찾은 한국은 낯설지 않았다. 그는 입양 뒤에도 현지에서 한국 문화를 접하고 살았다. 암스테르담에 한국 영화가 걸리면 어김없이 찾았다. DVD·책에도 늘 관심을 뒀다. 직원 윤지영씨는 “나보다 한국 감독을 더 많이 알고 있어 놀랐다”라고 귀띔했다.

헤어졌던 어머니는 16살 때 다시 만났다. 어머니가 네덜란드로 편지를 보내온 지 2년 만이었다. 하지만, 만남 이후에도 변한 건 없었다. 그는 재회 뒤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사고방식으로 자란 그는 더 이상 ‘김은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어도 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는다. 대신 자주 연락하고, 명절에 찾아갈 뿐이다.

“많은 입양아가 가족을 찾지만, 만나서 울고 껴안고 하는 게 끝이 아니에요. 오히려 시작이죠. 가족을 보기 전에 어떻게 문화·언어·세대의 차이를 극복할지를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해요.”

 글=이도은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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