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배명복 시시각각

10·4 선언 1주년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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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7개월 만에 첫 서울 나들이에 나선다. 다음 달 1일 서울 밀레니엄 힐튼 호텔에서 열리는 10·4 남북 정상 선언 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주최 측은 이미 350여 명에게 초청장을 보냈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평양 방문에 동행했던 각계 인사와 참여정부에 몸담았던 사람들, 여야 관련 정치인과 학계 인사, 그리고 이명박 정부 측 일부 인사가 초청 대상이라고 한다. 초대받은 여권 정치인과 현 정부 인사들의 참석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들이 외면할 경우 기념행사는 ‘그들만의 쓸쓸한 잔치’로 끝날 수 있다.

통일부는 고민 중이다. 장관과 차관 앞으로 초청장이 도착했지만 아직 가부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회 일로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를 댄다. 참석 가능성을 묻자 현재로선 정확하게 ‘50 대 50’이라고 대답한다. 자체적으로 논의해봐야겠지만 ‘저쪽’과의 협의도 필요하다고 한다. 청와대의 ‘OK 사인’이 없으면 가기 힘들다는 말로 들린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6월 6·15 공동선언 8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남북관계의 경색을 푸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공들여 연설문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시비를 거는 바람에 막판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준비한 연설문이 청와대 스크린 과정에서 대폭 수정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대못질을 한다는 심정으로 10·4 선언에 서명했겠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이명박 정부 입장에서 전 정부가 던져놓고 간 10·4 선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다. 존중한다고 말은 하지만 남과 북이 체결한 여러 합의 중 하나로 볼 뿐이다.

통일부가 뽑은 견적서에 따르면 10·4 선언 이행을 위해서는 14조3000억원의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일방적인 퍼주기는 하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집권한 현 정부 입장에서 전 정부가 합의했다고 그대로 따르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부는 북핵 문제의 진전, 경제적 타당성, 재정 부담 능력, 국민적 합의라는 네 가지 원칙을 세웠다. 이 원칙들을 지키면서 북한 당국과의 협의를 통해 구체적 이행 방안을 마련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 여전히 미결인 상태에서 북핵 문제는 되레 거꾸로 가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임기 중 6자회담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은 사실상 물 건너간 분위기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으로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북한은 검증 문제를 둘러싼 불만을 내세워 영변 핵시설 복구에 착수했다. 미국도 강공으로 돌아섰다. 부시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국제사회에 대북 제재를 촉구하고 나섰다.

정부는 북한에 대한 대규모 지원 프로젝트 추진을 위해서는 핵신고 완료 및 핵폐기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북핵 문제는 신고 단계를 넘지 못한 채 후퇴하고 있다. 다른 세 가지 원칙은 고사하고, 당장 북핵 문제 때문에 10·4 선언의 이행은 더욱 요원해졌다. 남북관계 경색 국면의 장기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고심 끝에 상생과 공영을 대북정책의 비전으로 제시하면서도 대선 공약인 ‘비핵·개방 3000 구상’을 그 하위 개념으로 유지하고 있다. 북핵 문제에 진전이 있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이진 않겠다는 것이다. 상대가 먼저 변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겠다는 뜻이다. 그걸 정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름지기 정책이라면 어떻게 해야 상대가 변하도록 유인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통일부 장관의 10·4 선언 기념행사 참석은 북한에 보내는 전략적 신호가 될 수 있다. 말로만 상생과 공영을 외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작더라도 의미있는 행동 하나가 중요하다. 김하중 장관은 기념행사에 나가야 한다.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결정 하나 소신있게 못하는 장관이라면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낫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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