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박물관 붐비게 한 ‘공무원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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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끼여 있는 서울의 북촌은 한옥 밀집 지역이다. 동서·남북으로 1㎞ 남짓한 곳에 한옥 90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청계천과 종로 북쪽에 있다는 뜻으로 조선시대부터 ‘북촌’이라 불렸다.

가회동·삼청동·원서동·재동·계동을 아우르는데, 이 중 한옥이 가장 많고 보존도 잘돼 있는 동네가 가회동이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따라 한옥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는 곳이다. 민화·매듭 등 전통을 주제로 한 사립박물관·문화원도 예닐곱 된다.

가회동엔 올 4월 ‘북촌박물관 자유이용권’이라는 게 생겼다. 개별 입장료가 2000∼5000원인 사립박물관 다섯 곳을 1만원(어른 기준, 어린이는 5000원)에 모두 볼 수 있는 표다. 가회박물관·한상수자수박물관·동림매듭박물관·한국불교미술박물관·서울닭문화관들로, 걸어서 5분 거리 안에 모여 있다. 자유이용권은 기한에 구애받지 않고 쓸 수 있다.

자유이용권 아이디어는 서울 종로구청 관광과 주임 이미경(29·사진)씨에게서 나왔다. “모두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곳들이지요. 그런데 어떨 때 가보면 홍보가 안 돼 있어 관람객이 한 명도 없는 게 속상하더라고요”라고 동기를 설명했다.

세종대 호텔관광경영학부를 졸업한 이 주임은 유명 통신회사에 다니다 공무원 시험에 도전, 2006년 종로구청 9급 공무원이 됐다. 혜화동사무소에서 민원업무를 보다 지난해 7월 자신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서울시 자치구 중 처음으로 종로구청이 ‘관광과’를 신설한 것이다.

북촌 관광마케팅 지원 업무를 맡게 된 그는 가회동 박물관들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됐다. 깔끔한 레스토랑·와인바가 속속 들어서 인파가 붐비는 삼청동과 달리 한옥 민가가 많은 가회동은 조용하고 한산했다. 가회동 박물관에도 입장객이 매우 적었다. 이 주임은 개별 박물관을 묶어 싸게 입장할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올 연초부터 관장들을 일일이 만나 공동으로 수익을 분배하는 자유이용권 도입을 제안했다. 하지만 “돈 벌자고 박물관 연 게 아니다”는 부정적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박물관 다섯 곳에 1만원이라면 방문객에게 큰 부담이 아니다” “자유이용권을 사면 이를 사용하려고 가회동을 두세 번씩 더 찾게 된다”며 설득했다.

4월 중순엔 구청 예산 30만원을 따냈다. 그리고 자유이용권 1만 장을 제작, 박물관 다섯 곳의 매표소에 깔았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단체로 북촌 답사를 온 내국인들, 외국인 배낭 여행자들을 중심으로 자유이용권을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자유이용권은 첫 달인 4월에 50장, 5월 174장, 그리고 지난달에는 220장이 팔렸다. 이런 추세라면 박물관들은 연말까지 수천만원의 입장 수입을 얻을 수도 있다. 자유이용권 발행으로 ‘가회동=박물관촌’이라는 입소문도 나기 시작했다.

가회박물관장이자 서울시박물관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윤열수(62)씨는 “박물관 자유이용권 제도는 전국에서 가회동이 처음”이라며 “이 주임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가회동의 성공에 힘입어 삼청동에서도 박물관 다섯 곳(세계장신구박물관·티베트박물관·북촌생활사박물관·토이키노박물관·부엉이박물관)을 1만5000원에 볼 수 있는 자유이용권이 이달 1일 생겼다.  

성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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