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倫이 실존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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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TV가 ‘불륜’이란 드라마 소재를 포기할 수 없는 건 인지상정으로 보인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처럼 인생 전체가 뒤흔들리는 드라마틱한 경험이 없기 때문일 거다.

부부 사이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건 그동안의 삶에 대한 갖가지 믿음과 자존심을 통째로 흔드는 것인 데다 처절한 본능과 함께 쌓아온 재산, 아이들의 앞날까지 고려해야 하는 총체적 갈등이다. 드라마로선 적나라한 욕망의 충돌과 존재의 흔들림 어느 것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흥미진진한 그림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 남녀 사이에 부는 ‘바람’을 버리지 못하는 드라마를 욕하긴 힘들다.

MBC 드라마 ‘달콤한 인생’은 그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선 네 명의 인물이 어떻게 자신의 내면과 마주치는가에 초점을 맞춘 독특한 드라마다. 돈 잘 버는 남편과 모범 주부의 맞바람 이야기는 그 불륜의 사건이 몰고온, 이른바 ‘실존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펀드 매니저인 정보석과 전업주부 오연수, 정보석의 젊은 연인 박시연과 그녀를 사랑했고 지금은 오연수를 사랑하는 이동욱 네 사람은 모두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심하게 정신적으로 종속된 상태에 있었다. 세상을 승부의 장으로만 파악하는 정보석은 성공·돈·애인까지 모든 걸 쟁취해 왔지만 방향 없는 성공의 집착 때문에 덫에 걸린다.

그에게서 1차적인 욕구만을 해결하는 박시연과 부자 친구의 ‘따까리’로 살다가 결국 그의 이름마저 훔친 이동욱 역시 물질만능주의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연수 또한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은 남편과 10여 년을 살면서도 이것이 사랑이고 행복이라는 허상 속에 스스로를 옭아매 왔다.

부부의 맞바람을 계기로 이들은 서서히 진짜 자신의 모습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 드라마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걸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먼저 그걸 깨달은 오연수가 정신적인 독립 선포를 한다. 남편에게 “버림 받을까 봐 구걸하면서” 받아왔던 사랑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남편의 찬장 속 접시로만 여겨지는 자신에게 간절하게 기쁘고 슬픈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과의 애정을 허용한다.

애인에 대한 복수로 오연수를 사랑하기 시작한 이동욱 역시 친구의 거짓 이름과 지위가 아닌 진짜 자기 모습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다. 그의 안타까움 못지않게 박시연도 자신이 진실로 원했던 사랑(이동욱)을 되찾고 싶지만 물질적인 욕망으로 얽히고설켜 버린 네 사람의 관계 때문에 괴롭다.

가장 뒤늦게 자기를 깨닫고 있는 건 정보석이다. 아내의 정신적 독립선언 앞에서도 이것을 “원상복구시켜 놓아야만 하는 해결할 일”, 혹은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승부로 여겼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사냥하듯 살아왔던 인생에서 내가 사냥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슬픈 존재임을 깨닫는다.

위험하지만 이렇게 서서히 어딘가에 투영된 모습이 아닌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아 가고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라면 ‘불륜’이라는 것도 그다지 나쁜 계기만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그 깨달음과 정신적 독립에 희망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하긴 우리가 원해서 쌓아 올린 그 허상에의 종속을 벗어나기가 어찌 쉬울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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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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