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 마리 한우, 아빠 소는 50마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우리나라 한우 200만마리의 '아비'는 몇마리일까. 정답은 50마리다. 이들은 모두 충남 서산의 한 '사관학교'에 모여있다. 농협중앙회 산하 한우개량사업소가 바로 그곳이다. 지난 두달간 광우병 파동의 여파로 한우에 대한 신뢰도도 크게 떨어졌지만, 한우개량사업소에서 특별관리되는 '황제소'들은 한국 한우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대단한 소들이다. 중앙SUNDAY가 그 현장을 다녀왔다.

충남 서산의 한우개량사업소에 있는 ‘보증’ 씨수소들. 귀에 ‘626’ 숫자카드를 매단 소(오른쪽)가 국내 최우수 황제소인 ‘KPN626(등록관리번호)’이다. 최정동 기자

“움머~.”

맑고 곧게 뻗어나가는 울음, 장정 팔뚝만큼이나 굵은 두 뿔에 떡 벌어진 어깨의 육중한 상체. 2일 충남 서산의 한우개량사업소에서 만난 국내 최고의 ‘황제소’ KPN626의 모습이다. 2002년 12월4일 충남 논산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 이듬해 6월에 전국에서 선발된 200마리 수송아지와 함께 사업소에 ‘입소’했다. 목표는 국내 최고의 씨 수소가 되는 것. 4년6개월 간의 험난한 테스트를 거쳐 지난해 12월 정상에 올라 지금껏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선발 기준은 육질과 육량의 우수성이다. KPN626을 도축했을 때 예상되는 고기량(도체중:머리·다리·내장 제외) 은 '입소 동기'들보다 3%, 육질의 기준이 되는 마블링(살 속에 지방이 고루 퍼져있는 정도)은 20% 뛰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일반적으로 800kg의 소 한 마리를 잡으면 고기량이 전체 체중의 60%(480kg) 정도 나온다.

축산과학원 김시동 박사는 “KPN626에게서 최근 7개월 동안 일주일에 2~3차례 정액을 뽑아낸다”며 “아마도 그간 이 녀석의 씨를 통해 송아지 1만여 마리는 잉태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KPN626은 한국 씨수소 육종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부계로는 ‘증조부’, 모계로는 ‘외고조부’도 한우개량사업소의 씨수소였다.

◇한우는 지금 진화 중= 지금의 한우는 옛날 논밭을 갈던 왜소한 누렁이가 아니다. 25년 전 평균 290㎏(18개월 기준)에 불과하던 한우 수소의 무게는 매년 8.5㎏씩 늘어 지난해에는 567㎏으로 커졌다. 쇠고기의 품질을 말해주는 1등급 출현율(전체 한우 중 1등급의 비율)도 10년 전 50.5%에서 지난해 71.5%로 크게 높아졌다. 육종 기술이 발달한 덕분이다. 종자개량을 통해 뛰어난 작물을 만들어 내듯, 한우도 25년 동안 변화를 거듭했다. 초창기에는 몸집을 키우는데 주력했지만 10년 전부터는 육질 개선이 우선시 되고 있다. 농촌진흥청 축산과학원의 이상철 과장은 “한우 종자개량으로 인한 경제적 가치는 매년 최소 10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국내 유일의 한우개량사업소= 서산한우개량사업소는 국내 유일의 한우 육종 전문기관이다. 이곳에 있는 씨수소 50여 마리의 정액이 전국의 한우농가에게 배급된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전국 한우 200여만 마리의 ‘아비’가 되는 셈이다. 우수한 ‘씨’를 받고 태어난 송아지의 육질과 육량이 확률적으로 좋기 마련이다.

하지만 근친교배의 문제가 있다. 매년 50마리의 씨수소가 전국으로 씨를 퍼뜨리고, 이렇게 태어난 송아지 중 씨수소가 선발되는 것이 반복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국내 한우들의 유전형질은 닮아갈 수밖에 없다. 8촌 이내의 근친교배로 태어난 송아지는 유전적인 결함으로 생식능력이 없거나 특정질병에 취약한 결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한우개량사업소에서는 농가에 정액을 보급할 때 근친교배가 되지 않도록 근친 씨수소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축산과학원 김 박사는 “씨수소의 정액을 채취할 때도 유전정보를 파악한다”며 “근친도가 가까워질 때는 계통이 다른 씨수소를 끼워넣는 등의 방법을 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공장 같은 축사= 취재진이 찾은 서산한우개량사업소는 마치 첨단 반도체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 건물 출입문에 들어서니 밀폐된 공간에서 강력한 바람과 함께 소독액이 뿌려졌다. 방문자의 몸에서 먼지를 떨어내고, 병원균을 죽이기 위한 목적이다. 소독실을 빠져나가면 방진복처럼 생긴 흰 방역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 입어야 한다. 신발도 그냥 신고 들어갈 수가 없다. 반드시 일회용 덧버선을 신어야 한다. 이어 다시 한번 소독실을 거치고 나서야 씨수소들이 사는 축사 앞마당까지 들어설 수 있었다. 그나마도 외부인은 축사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한우개량사업소 김종집 관리팀장은 “혹시 모를 병원균에 씨수소가 한 마리라도 감염된다면 같은 축사 안의 다른 소들을 도살해야 한다”며 “이는 우리나라 축산업계 전반의 재앙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국의 한우 수컷 중 선발된 50여 마리인 만큼 사육 환경도 특별하다. 일반 축사와 달리 ‘1인 1실’이다. 어떤 소보다 건강하고 야성이 살아있는 황소인 만큼 서로 싸우다 다칠 경우를 막기 위한 방법이다. 씨수소의 몸무게는 대개 800㎏ 미만이다. 노 박사는 “도축장에 나오는 한우는 1000㎏이 넘는 경우도 있지만 씨수소는 고기소용이 아니라 정액생산용인 만큼, 오히려 적당히 말라야 좋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곡물사료가 아닌 풀을 주로 먹인다고 했다.

◇씨수소의 목숨 건 경쟁= 한우개량사업소에는 매년 두 차례, 전국에서 선발된 송아지 200마리씩이 들어온다. 6개월 뒤 200마리 중 180마리를 씨수소 대상에서 탈락시킨다. 나머지 20마리는 다시 1년6개월간 길러진 뒤 정액을 축산농가에 보급된다. 여기서 태어난 송아지들이 사업소로 들어와 도축돼 육질 검사를 받는다. 씨수소의 유전형질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검사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5년에 가까운 과정을 거쳐 10마리 안팎의 씨수소 선발이 완성된다. 이들 씨수소는 선발 후 약 3년 동안 일주일에 2~3차례씩 정액을 생산한다. 3년 동안만 정액을 생산하는 이유는 근친교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축산과학원에 따르면 36개월 이상 정액을 생산하면 전국 축산농가에서 인공수정을 할 때 근친교배의 가능성이 커진다.

이처럼 어렵게 선발된 씨수소 한 마리를 값으로 따진다면 약 9억 원에 이른다. 시험관 한 개에 든 1등급 정액의 가격은 7500원이고, 한 마리가 36개월 동안 약 12만개의 정액시험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의무를 다한 씨수소는 도축장으로 보내진다. 이때의 나이는 96개월(8년). 노쇠한 소이기 때문에 육질은 최하수준(3등급)으로 떨어진다. 황제소의 마지막 운명이다.

서산 한우개량사업소 = 최준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