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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는 더 이상 필요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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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직장을 다니면서 한 번도 사표 낼 생각을 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일은 즐겁게 신나게 해야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런가. 사표를 내고 나면 마음도 떠나게 마련이다. 겉돈다는 얘기다. 평범한 샐러리맨도 그럴진대 조직의 책임자라면…. 사표를 ‘쇼’로 냈든 아니든 수리 여부가 결정될 때까지 영(令)이 서겠는가.

이명박 정부의 내각도 그런 꼴이다. 한승수 총리를 비롯한 15개 부처 장관이 쇠고기 파문의 책임을 지겠다며 이 대통령에게 일괄 사의를 표명한 게 지난달 10일이다. 대통령은 한 달 가까이 누구를 쓸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종교계까지 가세한 엊그제 대규모 주말 촛불집회 때문일까. 곧 개각을 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시지탄이다. 개각 폭은 작다고 한다. 총사퇴를 하겠다는 내각에서 기껏해야 두서너 명만 바꾼다니. 금세 실력이 바닥난 ‘깜’도 안 되는 이들을 끌어안고 가려는 대통령의 용기를 국민이 받아들일지 걱정이다.

총리와 장관들이 어정쩡하게 일하는 사이 공무원들도 겉돌았다. 사표를 낸 사람에게 힘이 쏠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처음부터 교체설이 나와 ‘식물장관’이 된 부처는 더 심각하다. 새 정책을 내놓을 수도, 내놓을 생각도 하지 않는 국정공백이 빚어진 것이다.

‘얼리 버드’와 ‘노 홀리데이’ 쇼를 따라 하던 공무원들은 지쳤다고 아우성이다. 시니컬한 모습까지 보인다. 중앙부처의 한 국장은 “새벽에 출근해 밤 11시가 넘도록 근무하기 일쑤다. 힘은 드는데 일은 허투루 한다. 연극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4일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에서 벌어진 ‘점심’ 소동도 공무원들의 냉소주의를 보여준다. 행정안전부는 주변 상권을 살리자며 이날 하루를 ‘외식의 날’로 정해 구내식당 문을 닫았다. 1970년 개청 이래 처음이라니 별난 일이기는 했다. 청사 주변은 한꺼번에 빠져 나온 5000여 명의 공무원으로 북적거렸다. 평일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공무원은 1200여 명. 이들도 외식을 했으니 음식점에 도움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이렇게까지 쇼를 해야 하느냐” “머슴 취급하더니 밥도 아무 데서 못 먹느냐” “구내식당과 재료 공급상의 매출이 줄어들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질문을 하던 기자가 오히려 머쓱해졌다.

공무원들 겉으론 꽤 변했다. 노력도 한다. 정부가 공무원에게 강조한 7대 캐치프레이즈를 보자. 청백리·베스트·팀워크·글로벌·블루오션·사이트(현장 중심)·서번트(머슴)다. 6개가 영어 단어니 영어 실력도 늘었겠다. 현장을 중시한다며 민원인들을 찾아가고 밥값을 직접 내기도 한다. 나랏돈을 자녀 학교에 퍼주려고도 했다. 노무현 정부 때 키워드였던 ‘로드맵’이나 ‘혁신’은 캐비닛 속에 잠가버렸다. 모드 전환을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속을 까보면 실망스럽다.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이 여전하고, 국민을 걱정하는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는 동안 경제는 망가졌다. 다만 촛불경제 하나만큼은 확실히 살린 것 같다. 시위가 두 달 이상 계속되면서 양초 장사만 대박을 터뜨렸다니. 그런데 그 양초 대부분은 중국산이다.

인사 무원칙이 문제다. 베스트만 쓰겠다던 대통령이 워스트 장관을 고르니 관료 인선도 닮아가는 꼴이다. 조직개편을 한답시고 엉뚱한 사람을 잡기도 한다. 일 잘하고, 조직 잘 이끄는 관료가 하루아침에 ‘무능맨’으로 점지돼 4개월째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연수 중이다. 평가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줄서기와 눈치보기가 실력을 이기는 것이다.

차분히 생각해 보자. 자동차를 몰 때 급출발·급제동을 하면 연비도 떨어지고 차량 수명도 짧아진다고 한다. 운전자가 누구냐에 따라 승객들의 안전과 승차감도 달라진다. 정부도 같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일의 완급을 조절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국민을 감동시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통령도, 장관도, 공무원도 다시 시작하라. 더 이상의 쇼는 필요없다.

양영유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