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아름다운 가게'로 오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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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이, 하늘도 무심하시지…."

'지상 최대의 벼룩시장'이 열린 지난해 11월 8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어젖힌 나는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빗방울이 섞여 흩뿌려지는 날씨. 그동안 이 행사를 준비하느라 며칠 밤을 새워온 아름다운 가게 식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과연 행사가 제대로 열릴 수 있을까.

초조함에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도착한 잠실 주경기장에는 그러나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과 손에 손에 물건을 들고 나온 시민들이 줄을 이어 입장하고 있었다. 오후 들어 비가 개자 그 넓은 운동장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쓸모 없어진 각종 살림살이.옷가지.헌책.가방 등이 깨끗하게 손질돼 싼값에 팔렸다. 우리는 괜히 신이 나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고 값을 물어보고 물건도 들쳐보며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렸다.

쓸모없는 물건이 새 주인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생긴 수익금은 불우이웃을 돕는 데 사용되는, 순환과 나눔의 아름다운 장터는 그렇게 시작됐다. 2002년 10월 아름다운 가게 안국점이 문을 연 이래 이 나눔의 정신은 이제 전국 18개 아름다운 가게에서만이 아니라 매월 한차례 대형 장터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첫 행사인 '아름다운 나눔장터'가 지난 27일 열렸다. 날씨는 화창했지만 행사장으로 가는 내 마음은 여전히 초조했다. 시민들이 과연 많이 나와주실까, 날씨 좋은데 다른 데 놀러가지 않을까, 강바람이 춥지는 않을까. 하지만 한강시민공원 뚝섬유원지역 광장에서 나는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순환과 나눔의 정신이 이제 우리 사회에 새로운 문화로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청담대교를 떠받드는 아름드리 교각 사이에 끝을 모르고 펼쳐진 좌판과 좌판, 그리고 웃음꽃을 피우며 즐겁게 사고파는 사람, 사람들. 강변에 흐드러진 노란 개나리들은 초조했던 나에게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이라는 흥겨운 팝송을 불러주는 듯했다. 옛날 어릴 때 할머니 손잡고 가보았던, 닷새마다 한번씩 서는 장. 그야말로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던 그 장터 풍경들이 서울시내 한복판에 고스란히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다 해지고 달아 못쓰게 돼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아껴 쓰고 다시 쓰던 조상님들의 지혜가 이 넓은 광장에서 다시 폭발하듯 분출되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물건을 단돈 5000원에 샀네"하고 점퍼를 펼쳐 보이시던 할아버지, "이거 예쁘지 않아요"하고 장난감을 불쑥 내밀던 어린이들. 봄볕에 얼굴이 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서 유지에 땀을 흘린 활동천사(자원봉사자)들. 모두가 소풍 나온 학생들처럼 싱글벙글이었다.

각박하고 힘든 세상살이에 이런 장터가 생겼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다고 어느 할머니는 자꾸 내 등을 두드려 주신다. 나는 아무 한 일 없이 과분한 칭찬을 받고 얼굴이 붉어진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래,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아까운 물건을 죄책감 없이 버리고 살았던가. 어려운 이웃에겐 또 얼마나 무심했던가"라고.

나는 세상살이에 막 짜증이 날 때도 아름다운 가게 생각만 하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어디서 이런 물건이 나왔을까 하는 신기함도 그렇거니와, 그 물건이 쓰레기통이 아닌 새 주인의 품으로 가서 제 역할을 하고 무엇보다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으로 변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기회만 있으면 원수처럼 헐뜯고 싸우는 정치인들도, 부부싸움으로 스트레스 팍팍 받고 있는 주부들도, 정신없는 세상살이에 휘둘리는 직장인들도 모두 아름다운 가게로, 아름다운 장터로 초대하고 싶다. 장터를 한바퀴만 돌고 나면 그래도 세상은 참 아름답고 여전히 살 만하다는 걸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손 숙 아름다운 가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