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즐거운천자문] 3년간의 땀열정 빛난 다큐멘터리 ‘밤의 제왕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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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밤의 포식자 수리부엉이와 경영의 귀재 잭 웰치 중 누구를 만나는 게 더 어려울까. KBS 자연다큐멘터리 ‘밤의 제왕 수리부엉이 3년간의 기록’을 보며 김재환 PD의 얼굴이 떠올랐다. “잭 웰치를 만났으니 꼭 시청하라”고 전화한 게 2년 전 일이다. MBC 스페셜로 방송된 리더십 연작 중 ‘CEO의 황제 잭 웰치’편을 연출하면서 직접 인터뷰를 했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늦은 시간 잭 웰치의 경영철학에 관한 장황한 분석이 이어졌지만 30분이 지나도 PD와 주인공의 상봉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터뷰에 성공했다는 게 아니라 인터뷰를 시도했다는 과장이었나? 호기심은 인내심으로, 다시 인내심은 실망감으로 차츰 변해 갔다. 40분, 50분이 지나 이제 스태프 명단이 나올 즈음 화면에 낯익은 얼굴이 등장했다.

보스턴의 고색창연한 건물 앞에서 죽치고(?) 있던 제작진은 잭 웰치 부부가 나타나자 전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가 소유한 6채의 저택 가운데 가장 허름한 집이었다. “당신의 리더십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백인 남자의 황당한 표정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 한적한 토요일 오후 집 앞에서 생면부지의 인물에게 느닷없이 리더십의 비밀을 묻다니. 그러나 그는 동양에서 온 ‘무뢰한’ 앞에 작은 언어의 선물을 던졌다. “이기는 것(winning)이 리더십이다.” 이기는 비결에 대해 다시 묻자 딱 한마디를 추가했다. “열정(passion).” 그리고 이 지루했던 다큐멘터리는 산뜻하게 끝났다.

다큐멘터리는 기다림의 소산이다. 제작진도 기다려야 성취하고 시청자도 기다려야 무언가를 얻어낸다. 수리부엉이와 대화하기 위해 3년을 숲에서 보낸 신동만 PD는 제작 후기에 이런 말을 남겼다. “수리부엉이 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수리부엉이의 일원이돼 수리부엉이처럼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년간 흘린 땀의 흔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지성과 동물의 야성이 날카롭게 대결하는 국면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작정 카메라를 뻗쳐 놓고 기다려서는 수리부엉이 제국의 엄밀한 경호를 뚫을 수 없다. 새들이 부리와 날개로 진용을 갖추는 동안 연출진은 와이어와 헬리캄 등 신종 장비로 철저히 무장해야 한다.

명작 탄생에는 ‘3정’이 필수적이다. 정보와 정열과 정성이다. 잭 웰치를 만나 리더십의 요체를 육성으로 들은 경위도, 수리부엉이의 은밀한 사생활을 처음으로 들춰낸 과정도 치밀한 탐색과 근성, 그리고 밤낮을 거꾸로 살 만큼의 성의가 빚어낸 결실이다. 어린 수리부엉이들이 날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비탈길을 힘겹게 걸어 올라 둥지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아들도 수리부엉이처럼 씩씩한 사나이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쓴 네티즌(아이디 원선)의 글을 읽으며 제작진은 3년간의 고생이 한순간에 사라짐을 몸으로 흔연히 느꼈을 것이다.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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