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를 잡아라… 금융사 ‘부자 마케팅’ 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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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소리를 들으려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할까. ‘10억원’을 꼽는 프라이빗뱅커(PB)들이 많다.‘세계 부자 보고서’를 11년째 발표해 온 미국의 투자은행 메릴린치도 100만 달러를 잣대로 삼는다. 물론 아파트와 땅을 뺀 금융자산을 말한다. 한국에서도 이런 부자가 급증한 것으로 파악됐다. 주식을 필두로 온갖 자산 가격이 뛰면서 푸짐한 잔치판이 벌어진 덕이다. 점점 돈 벌기 어려워지는 금융사들엔 신천지다. 황제의 호사를 뺨치는 금융사의 VIP 마케팅을 통해 요즘 부자 동네 풍경을 들여다봤다.

증권 부자 10만 명 넘었다
13일 오후 3시, 여의도 동쪽의 알리안츠 빌딩. 17층 전체를 쓰는 국민은행의 골드&와이즈 PB센터에 들어서자 기분 좋은 향수내가 코를 간질였다. 이곳에 드나들려면 금융자산만 30억원 넘는 ‘울트라 부자’여야 한다. 국내에서 가장 문턱이 높은 PB센터다. 10개의 상담실은 맵시 나는 가구와 유명 화가의 그림으로 단장돼 있었다. 이날 센터에선 잠재 고객 40여 명을 대상으로 특별행사가 열렸다. 세무사가 2008년 세법 개정안을 꼼꼼히 짚어줬고, 프랑스의 고가 화장품 회사인 시슬리의 뷰티 강좌도 열렸다.

국민은행은 부자 시장(市場)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고 지난해 8월 센터 문을 열었다.
실제 수치로도 그렇다. 중앙SUNDAY가 조사했더니 3년 전과 비교 가능한 삼성·우리투자·미래에셋·한국투자증권 등 4개사의 VIP 고객은 10만6000여 명으로 3년 전보다 142% 불었다. <그래픽 참조>

VIP 분류 기준은 다양하지만 최소 1억원 이상을 굴려야 한다. 10만 명의 금융자산은 총 47조원에서 116조원으로 늘었다. 우리투자증권 김정호 마케팅팀장은 “주식·펀드·주가연계증권(ELS) 같은 자산이 두 배 이상 늘어난 고객이 많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부자 고객 통계의 공개를 극히 꺼린다. 그러나 한국은행 집계에 따르면 시중
은행의 고액 통장(5억원 이상)은 7만 개로 3년 새 11% 늘었다. 예치금액도 218조원으로 26% 커졌다. A은행 관계자는 “3년간 VIP 고객이 2000명에서 4000명으로, 예치자산은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불었다”며 “부동산에서 금융으로 돈의 흐름이 옮기면서 금융 부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족집게 집사

현대카드는 다음달 초 크리스티 경매에 나오는 고급 와인을 맛보는 행사를 연다. 연회비 100만원인 ‘블랙’카드 고객 1500명에게 초청장을 보낸다. 와인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와 함께 세계 와인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크리스티의 와인 고문 앤서니 핸슨의 강연도 곁들인다. 현대카드는 지난해 7월부터 루이뷔통의 이브카셀 회장, 할리데이비슨 전설을 만든 전 최고경영자(CEO) 리처드 티어링크 같은 저명인과 고객 간 만남을 주선해 왔다. 카드 서비스에 더해 ‘저명인들과 어깨를 비빈다’는 만족감을 파는 것이다. 한국투자증권이 제공하는 ‘펀드 매니저와의 대화’도 같은 맥락이다. VIP 전용 펀드를 굴리는 매니저들이 직접 고객 앞에 나와 운용 성과와 시장 전망 등을 일러준다.

장래 고객의 마음을 사려는 입도선매 작전도 눈에 띈다. 한국씨티은행은 고객의 대학생 자녀 12명을 초청해 싱가포르 아시아본부에서 1주간 인턴 기회를 줬다. 이런 서비스에 가장 적극적인 신한은행은 부자 고객의 자녀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주는 ‘PB 소사이어티 클럽’을 만들어 요트 체험과 재테크 교육까지 제공한다. 우리은행의 ‘요리 강습’은 여성 VIP 비중이 만만치 않아졌다는 방증이다.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폴 쉥크 총주방장은 지난해 봄 10억원 이상을 맡긴 우리은행 고객 20여 명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VIP 서비스는 2~3년 전까지만 해도 세무 상담이나 단순한 골프 모임, 와인 시음 등이 주류였다. 최근 이런 경쟁이 부쩍 치열해진 것은 부자 시장이 커지고, 여가시간이 늘고 부자 눈높이가 올라가면서, 웬만한 금고지기 노릇으로는 금융사들이 돈을 벌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자녀 문제·상속·법률 등의 라이프케어(Life-care) 서비스를 선사하는 집사(執事)라야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하나은행 PB팀장을 거쳐 미래에셋 서초로 영업점장으로 영입된 최철민(39)씨는 고객과 여행을 자주 떠난다. 재산은 많지만 집안일이나 속내를 터놓고 말하기 꺼리는 부자들을 위한 그만의 애프터 서비스다. PB일을 잘하기 위해 ‘인생 상담사’ 역할까지 소화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아내도 간간이 고객여행에 동참하는데, 여자 고객일 때7엔 특히 도움이 된다. 하나은행은 피트니스센터·식당 등 호텔 출입이 잦은 VIP 고객을 위해 2004년에 아예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PB센터를 열기도 했다.

물론 족집게 같은 투자 정보와 상품 제공으로 짭짤한 수익률을 안겨주는 것도 기본 몫이다. 신한은행을 보자. 선진 증시의 저평가 주식을 사고 고평가 주식은 매도하는 ‘주식 롱-숏 인덱스 파생펀드’와 중남미·동유럽 등에 투자하는 ‘신흥시장 로컬 채권펀드’처럼 VIP용 상품이 즐비하다. 한국투자증권도 최근 주가가 조정을 받자 연 7% 수익률을 추구하는 사모형 채권펀드를 발 빠르게 설정해 대기자금을 가진 부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요즘 부자들 고민은

이렇듯 알짜 서비스를 누리는 VIP들도 걱정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눈이 가는 곳에 돈이 옮겨가고 시장의 흐름도 바뀔 수 있는 만큼 ‘부자의 동선(動線)’은 다른 투자자에게도 참고서가 될 수 있다.

은행과 증권사가 파악한 ‘큰손’들의 화두는 뭐니뭐니해도 부동산이었다. 삼성증권은 “새 정부 출범으로 양도세·보유세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면서 부동산을 처분할지 보유할지 고민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밝혔다. A증권사 고객인 변호사 박모(45)씨는 지난해 대치동과 대전의 아파트에 대한 종부세·재산세 등으로 1400만원을 냈다.

내년에 아들이 영국으로 유학을 가는 터라 부담이 만만치 않아 부동산 세제 변화에 촉
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해 초 반짝했던 해외 부동산에 눈길을 주는 부자들도 생기고 있다. 다주택자에겐 세테크 차원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반기에는 해외 부동산 투자한도가 폐지될 전망이다. 주가 하락에 따른 펀드 손실도 우환이었다. C은행 고객인 이모(52)씨는 지난해 10월 중국펀드에 여윳돈 3억원을 넣었지만 30%가량 원금을 잃었다. 중국 경제의 성장 가능성을 믿기에 크게 동요하지는 않지만 왠지 찜찜한 건 사실이다. 개인병원을 하는 최모(55)씨도 지난해 10억원을 펀드에 투자했는데 원금이 8억원으로 줄었다. 상황이 이러니 주식·펀드 투자에 대한 전문적 상담을 더욱 갈구한다는 것이다.

VIP 고객은 ‘잘 불리는 것’보다 ‘잘 물려주는 것’을 최고의 재테크로 생각한다. 상속·증여와 기업 승계가 요즘 화두인 이유다. 국민은행 전유문 PB사업부장은 “60~80대 고객의 자산 이전 관심이 특히 높다”며 “기업가치 평가와 인수합병(M&A) 등의 승계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투자증권 PB전략팀 신언경 차장은 “기업을 물려주려고 하는데 세금 때문에 공장을 팔아야 하는 고객에게 기업공개로 돌파구를 찾으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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