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도 멀쩡했는데 못 지켜서 죄송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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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주씨가 침통한 표정으로 전소된 숭례문 앞에 서 있다. [사진=김성룡 기자]

11일 오후 5시쯤 검은 잿더미로 변한 숭례문 앞 광장에 국화 스무 송이가 배달됐다. 꽃다발에 달린 리본에는 ‘조상님 유산을 못 지켜 죄송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 시간 후 검은 양복 차림의 한 노신사가 꽃다발 옆에서 숭례문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이어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묵념을 했다.

화재로 대한민국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무너져 내린 현장을 찾은 이는 임영대군의 16대 손인 이종주(71)씨다.

세종대왕의 4남 임영대군의 16대손인 이씨는 30여 년간 교육 공무원으로 지내다 1998년 정년 퇴임했다. 지금은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중국 베이징으로 여행을 갔다가 10일 밤 귀국한 그는 TV에서 숭례문이 붕괴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다 이날 딸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이씨는 “일제 강점기에도 지켜온 숭례문이 어떻게 단숨에 이렇게 될 수 있느냐”며 “내 가슴도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세종대왕의 자손으로서 우리 문화에 자부심을 가져왔고 그중에서도 숭례문을 남달리 좋아했었는데 조상의 얼을 지키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씨는 이날 숭례문 곳곳을 보고 또 보며 추억을 되새겼다.

“숭례문이 개보수됐던 61년에 구경을 왔었는데, 단청이 새로 그려졌는데도 한국의 얼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모습이었어. 요즘처럼 가까이에서 볼 수는 없었지만 차를 타고 지나갈 때면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지.”

이씨는 “숭례문은 나에겐 마음의 고향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동국대 법학과를 다니며 교직을 이수해 3년여 동안 여고 교사를 지냈던 이씨는 당시 학생들에게도 숭례문의 유래와 역사 등을 가르치곤 했다고 한다. 이씨는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崇禮門)이란 휘호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면 학생들이 무척 재미있어 했다”고 전했다. 이씨는 “어렸을 적에는 ‘남대문에 갔다 왔다’는 게 서울에 다녀왔다는 뜻으로 회자될 정도로 숭례문은 대한민국 수도의 상징이었다”고 소개했다.

도로로 둘러싸였던 숭례문에 광장이 생겨 시민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된 2006년 이씨는 서둘러 이곳을 찾았다. 당시 숭례문이 훼손될까봐 출입이 허용된 홍예문 안 중앙통로로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 참혹한 모습으로 변한 숭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그때는 정말 좋았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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