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범 채종기 ‘남 탓 인생 1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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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피의자 채종기씨가 12일 남대문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숭례문 방화사건 피의자 채종기(70)씨는 경기도 고양시 주엽동의 한적한 마을에서 1970년대부터 살아왔다. 남의 사주나 토정비결을 봐주는 철학관을 운영했다. 넉넉지 못했지만 평범한 인생이었다. 범죄 사실이래야 69년 향토예비군법 위반으로 벌금 5000원을 받은 게 전부였다.

그런 채씨가 사회에 적의를 품게 된 것은 6년 전이다. H건설이 아파트를 지으려 그의 토지 약 99㎡(30평)를 수용하려 했다.

이 회사는 2002년 공시지가 9600만원보다 약간 많은 1억원을 제시했다. 당시 공시지가는 ㎡당 54만원. H건설은 ㎡당 70만원 정도를 쳐줬다. 여기에 건물 값을 포함해 가격(1억원)을 산정한 것이다. 하지만 채씨는 “인근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낮다”며 4억~5억원을 요구했다. 건설사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채씨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그는 고양시청을 비롯해 청와대에까지 진정했다. 그러나 합리적 범위를 벗어난 그의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다. 소송에서도 패했다. H사는 2006년 3월 1억원의 공탁금을 걸고 집을 철거했다. 고양시 관계자는 “당시 공시지가를 볼 때 합리적으로 보상한 것 같다. 그 뒤 공시지가가 두 배 정도로 뛰었지만 채씨의 요구액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채씨는 송사를 시작한 뒤부터 잠꼬대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나쁜 놈, 나쁜 놈들”이라고 소리쳤다. 정부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자기 재산을 빼앗아 갔고, 정부가 이를 외면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채씨는 2006년 3월 “그냥 돈을 받고 끝내자”고 말한 부인과도 이혼했다. 이혼 후 한 달, 그는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질렀다. “억울함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법원은 초범인 데다 공탁금 500만원을 낸 채씨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내렸다. 주요 문화재를 불태운 피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채씨에게 1300만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그러나 채씨는 “지나치게 추징금이 많다”며 크게 반발했다. 당시 그는 밥벌이로 하던 철학관과 약품 배달 서비스업이 신통치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모든 일이 꼬이자 채씨의 국가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정부에 억울함을 여러 차례 진정했으나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자주 분노를 터뜨렸다고 한다. 집행유예로 선처를 해준 법원에 대해서도 반감을 표시했다.

채씨의 이 같은 ‘남 탓’이 국보 1호를 잿더미로 만든 범죄로 이어진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채씨는 문화재가 국가를 대신한다고 생각해 정부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기 위한 표적으로 숭례문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채씨는 10일 숭례문에 불을 지른 뒤 가족을 찾았다. 유일하게 기댈 곳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는 그날 밤 경기도 일산의 장남(44) 집을 들른 데 이어 다음날인 11일 새벽 이혼한 전처 이모(70)씨가 사는 강화도로 갔다. 그러나 채씨의 범행에 대해 가족들도 충격에 휩싸였다. 그의 막내아들(42)은 12일 “인터넷을 보니 우리까지 죽이겠다고 하더라. 여기에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했다.

강인식·이지은·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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