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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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좋아,그럼 너희들 공부하는거 눈감아줄게,얼마 있어?』 영석이였다.영석이는 가끔 재치가 있었다.
『눈감아주는게 아니라,너희 날라리들도 마음 바로 먹고 공부를하겠다면 내가 오늘 물주를 해도 좋아.』 승규였다.승규는 승규대로 그동안 우리와 어울리지 않고 갑자기 학구파로 전향한데 대해서 어지간히 켕겼던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승규의 5만원에나머지 아이들이 주머니를 다 턴 걸 합치니까 총계 12만7천원이었다.이 정도면 비비는 데에 가서 그런대로 한번 개겨볼 만 했다. 결국 우리는 라면과 김밥으로 저녁을 때우면서 소주 두병을 까고,요즘 아주 물이 좋다는 「라이브러리」로 갔다.우리 또래 아이들이 모이는 디스코장 치고는 제목이 그럴듯 했다.집에서누군가 식구가 옆에 있을때라도 전화를 하면서 떳떳하게 말할 수가 있는 거였다.좋아 도서관에서 만나.
우리가 라이브러리에 들어간게 8시쯤이었는데도 벌써 빈 자리가거의 없었다.이것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큰일이라고 승규가 장내를 둘러보면서 내숭을 떨었다.어쨌든 우리는 겨우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을 수가 있었다.우리는 한동안 춤추 는 것도 마다하고 소리소리 지르며 떠들어댔다.오랜만에 정규 멤버 넷이서 모이니까 다들 기분이 째지는 얼굴이었다.
정말 미치겠더라구,라면서 승규가 지난 두달여의 갑갑했던 생활을 악을 쓰면서 한탄했다.음악소리 때문에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말하기도 어려운 극한 상황이었다.우리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달수야,써니 문제는…더이상…어쩔 수가 없어.』 『뭐라구…?』 나도 소릴 질렀다.음악소리 때문에 상원이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이럴 때는 자연히 말들이 요점만 남는 법이었다.
『써니 말이야…이젠 지우라구.』 상원이가 손을 들어 허공에서X표시까지 해댔다.
『그래,알았어…니가…고생했어.』 나는 악동들에게 써니에 대해서 무언가 더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나는 자리를박차고 일어나 홀로 나서면서 선동했다.자 춤이나 추자구.그리고몸을 뒤틀었다.뜨거운 철판 위에 맨발로 선 것처럼 펄쩍펄쩍 뛰었다.악동들이 저 마다 엇비슷하게 근처에 어울려서 사지를 놀렸다.사이키 조명이 마구 흔들렸고 제목도 모르겠는 음악소리 사이사이에,디제이가 원 투 스리 퍼…레츠고 레츠고 라고 해댔다.
염병할…가는건 좋은데 어디로 가자는 건지…나는 땀을 펑펑 흘리면서도 쉬지 않고 춤을 췄다.이렇게 열심히 춤추다 보면 다른세계 어딘가로 훌쩍 옮겨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춤추는 아이들로 홀이 꽉 차 있었다.서로들 남의 어깨를 부딪고 남의 발을 밟고 남의 눈길을 순간적으로 점령하면서 오로지 미친듯이 춤을 추었다.춤추면서,나는 정말 써니를 잊기로 한 건가 하고 생각했다.다른 놈들이 전향수라고 쪼거나 말거나,나는 착한 아들이고 착실한 범생이다가,대학을 나와서 취직시험을 보고튼튼한 직장의 월급쟁이가 되고 부모님이 허락하는 여자와 결혼을해서 아이를 낳고 그렇게 늙어가기로 한 건가 하고 생각해보았다.눈을 감고 춤추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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