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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는 치킨 게임…우린 견딜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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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닉스는 참담한 실패도 해봤고 이를 딛고 일어난 소중한 경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에 급급했던 나머지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2010년까지는 괜찮을지 몰라요. 하지만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그 이후의 미래는 없습니다.”

김종갑(56) 하이닉스 사장의 시선은 예상보다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D램 메모리 가격은 9월 이후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기자의 관심은 자연히 ‘발등의 불’에 집중됐다. 하지만 그는 지금 당장보다 미래가 더 관심이라고 했다.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 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는 “지금은 어려워야 할 시기다. 어설프게 좋아졌다간 오히려 내년 이후 더 나빠질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의 불황, 오히려 기회 될 것"

김 사장과의 인터뷰 이후 발표된 하이닉스의 3분기 실적은 시장의 기대를 밑돌았다. 매출액(2조4370억원ㆍ해외법인 포함)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4% 늘었다. 하지만 영업이익(2540억원)은 지난해보다 44% 줄었다. 덩치는 키웠지만 실속은 오히려 떨어졌다는 말이다. 메모리 시장은 내년에도 낙관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김 사장은 “길게 보면 나쁘지 않은 상황” 이라고 했다. 공급 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필수적이고 시장 상황이 나쁠수록 그 시기는 앞당겨질 것이란 얘기다. 그는 “기술력에서 앞서는 삼성과 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에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해외 업체들에 비해 체력이 강한 만큼 ‘버티기’에도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특정 업체를 지칭할 수는 없지만 이미 내년 이후 투자 계획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요즘 세계 반도체 시장의 경쟁은 ‘치킨 게임’을 방불케 한다. 두 대의 자동차가 마주 보며 달리다 먼저 겁을 먹고 핸들을 옆으로 돌리는 사람이 패하는 게임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견디지 못하고 투자를 멈추는 업체가 진다.

예전 같으면 이미 승부는 끝났어야 했다. 선발 업체의 호령에 후발 업체들은 달리기 자체를 포기했다. 하지만 3년간의 호황은 대만 등지의 후발 업체들의 맷집을 키워놓았다. 그러자 삼성전자는 최근 투자를 더 늘리겠다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다.

*** "요즘은 잠 잘 잔다"

하이닉스도 후발 업체들에 “우린 줄일 생각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며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 미묘한 움직임도 눈에 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전자와 다른 후발 업체 사이에 낀 ‘샌드위치’ 형세다. 지난달 말 현물시장 공급을 중단하며 슬쩍 한 발을 빼는 모양새를 연출하기도 했다. ‘무한경쟁’만 벌이기엔 눈앞의 ‘실익’도 놓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하지만 김 사장은 “단가가 높은 고정거래 고객으로 물량을 돌리는 차원이지 결코 생산을 줄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샌드위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 사장은 상당 기간 불면의 밤을 보냈다.
“사실 석 달간은 고민하느라 밤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결론은 단기 시황 문제는 내가 걱정한다고 풀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실력 있는 업체가 살아남는 법이거든요. 그때부터 세세한 문제는 현장 전문가에게 맡기고 중장기 성장 과제에 집중하기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이제는 적응한 덕인지 “요즘은 잘 잔다”고 했다. 김 사장이 주로 고민하는 부분은 인력 확충, 그리고 협력 파트너를 찾는 일이다. 그는 "이제는 최고의 업체도 혼자 모든 걸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며 "경쟁사와도 공동연구· 생산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략적 동맹은 요즘 반도체 시장의 '유행'이다.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불안한 시장환경에서 서로 힘을 합치면 자금·기술 양면에서 모자라는 부분을 한 번에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이 새로운 전략 찾기에 올인하는 이유는 3분기 실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업계 1위 삼성전자는 예상보다 나은 성적을 냈다. 무엇보다 D램의 부진을 낸드플래시, 모바일ㆍ그래픽 D램 등 다른 고부가가치 제품에서 만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닉스는 낸드 생산량을 늘려 가고 있지만 여전히 D램의 비중이 높다.

2000년 이후 생존의 기로에서 '마른 수건까지 짜는' 원가 절감 노력 덕분에 D램 양산과 수율(생산성)을 높이는 데에선 세계 최고 수준에 왔다. 투자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런 '선택과 집중'은 회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때 하이닉스를 사들이려 했던 미국 마이크론은 최근 3분기 연속 적자를 냈다.

하지만 D램 가격이 급락하거나 공전 전환 과정에서 생산성이라도 떨어지게 되면 마땅히 수익을 복구할 만한 곳이 없다. 이른바 '천수답 구조'다. 김 사장이 2004년 구조조정 과정에서 매각했던 비메모리 사업에 최근 재진출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삼성전자에 비하면 여전히 실력이 떨어진다”며 “많이 배우고 있다”고 했다.

*** “지배구조에 정답은 없다”

김 사장은 취임 이후 ‘100년 가는 기업’을 모토로 정했다. 그러기 위해서 당장 급한 것은 ‘새 주인 찾기’다. 현재 대주주는 외환은행을 주간사로 한 주주협의회(옛 채권단)다. 올해 말로 이들 은행이 출자전환한 주식의 매각 제한(Lock-up)이 풀린다. 이들은 지난달 크레디스위스(CS)를 자문사로 정하고 지분 인수 후보의 탐색 작업에 들어갔다.

김 사장은 “주주협의회에서 여러 가능성을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은 지배주주가 비전을 갖고 과감히 투자해 반도체 사업을 성장시켰지만 그런 면에서 좀 처지는 기업들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단순히 '주인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 일각에서는 거론하는 ‘지배주주가 없는 포스코 형태’는 어떨까. 그는 “포스코는 지분 분산으로 성공했지만 기아차는 실패했다”면서 “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가 중추 산업이라는 특성상 해외 매각에 대한 거부감이 큰 탓에 업계에선 인수 후보로 LGㆍSKㆍ동부 그룹 등을 거론한다. 특히 LG는 1998년 ‘빅딜(대규모 사업교환)’ 당시 억지로 반도체 사업을 접어야 했던 경험이 있어 유력 후보라는 평이다. 하지만 LG전자 남용 부회장은 16일 “하이닉스 인수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일단 부인했다.

주인이 없는 탓에 자칫 투자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김 사장은 “현금 수입 내에서 투자한다는 원칙이지만 필요한 정도의 재원 마련은 가능하다”며 “내년에도 올해와 비슷한 수준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현장은 전쟁이다”

산업자원부 차관 출신인 김 사장은 올 3월 하이닉스호의 수장을 맡았다. 고위 공무원 출신의 입성에 회사 안팎에서 말도 많았던 게 사실이다. 공직자 출신의 최고경영자(CEO)로서 지난 7개월간 무엇을 느꼈을까.

“공직 생활 당시에도 기업을 많이 들여다봤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관전과 실전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현장은 전쟁이거든요. 벌써 올해 사업계획을 여러 번 수정했습니다. 공무원 시절에는 거의 없었던 일이죠.”

그러면서 “공직에 있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현장 행정 하라, 서비스 행정 하라’고 당부한다”고 소개했다. 한 하이닉스 관계자는 김 사장에 대해 “공무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달리 상당히 ‘액티브’하고 속도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임원들에게도 웬만한 지시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한다. 겉보기와 다른 점은 또 있다. ‘국제 신사’로 알려졌지만 “임원들을 나무랄 때는 정말 무섭게 깬다”는 전언이다.

그는 취임 이후 난제이던 이천 공장 구리공정 전환 문제를 매끄럽게 풀어갔다. 그간 완강히 반대해 오던 환경부는 ‘폐수 무방류 시스템’ 구축을 전제로 허용 쪽으로 방향을 튼 상태다. 그 배경에는 환경 경영 강화 등 자체적인 여건 조성 노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김 사장이 공직사회의 생리를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평이다.

공직생활 동안 그는 요직을 두루 거치며 비교적 굴곡 없는 길을 걸어왔다. 그는 “늘 좋은 팀과 일했고, 운도 따랐다”며 겸양을 보였다. 그러면서 “남보다 특출 나게 똑똑하지 않으니 '한 시간 덜자고 30분 덜 놀자'를 철칙으로 삼아왔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는 굴곡이 심한 곳이다. '필드'에 나선 그가 향후 숱한 난제를 극복하고 하이닉스를 성장 모드에 안착시킬 수 있을지 업계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

조민근 기자

김종갑(56) 하이닉스 사장은 WHO?

1974년 성균관대 행정학과 졸업
1975년 행정고시 합격(17회)
1999년 산자부 산업정책국장
2003년 산자부 차관보
2004년 특허청장
2006년 산자부 제1 차관
2007년 하이닉스반도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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