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기로에 선 미얀마 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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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미얀마도 그런 나라 중 하나다. 주어진 조건만 놓고 보면 뭐 하나 빠질 게 없다. 한반도의 3.5배에 달하는 넓은 국토와 5400만 명의 넉넉한 인구. 생태계의 보고(寶庫)인 열대우림. 석유와 천연가스, 희귀 광물자원과 최고급 티크 목재 등 풍부한 천연자원. 히말라야의 설산(雪山)에서 아름다운 열대 해변, 찬란한 불교 유적까지 사방에 널려 있는 관광자원….
한때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이기도 했고, 동남아에서 성장잠재력이 가장 크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 미얀마의 현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2005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80달러로, 유엔이 분류한 최빈국(最貧國). 구매력 기준(PPP) 1인당 소득은 세계 150위로, 북한(149위)과 비슷하다. 최근 5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9%로, 동남아에서 최하위다.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미얀마(당시 버마)는 비동맹 사회주의 노선을 택했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난은 62년 네윈이 주도하는 군부 쿠데타의 배경이 됐다. 네윈은 사회주의에 불교적 가치를 접목한 이른바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세워 국유화 정책을 밀어붙였지만 이로 인한 비효율과 민간 부문의 활력 저하는 마이너스 성장을 초래했다. 여기서 비롯된 88년 민주화 항쟁에 신군부는 유혈 강경진압으로 맞섰고,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전체 의석의 82%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지만 군부는 이를 무효화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철권 통치를 20년 가까이 계속하고 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또다시 미얀마를 휩쓸고 있다. 어제로 9일째다. 이번엔 스님들이 앞장서고 있다. 스님들이 걸친 가사의 색깔에 빗대 ‘사프란(saffron·선황색) 혁명’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민주화를 외치는 스님들의 행렬에 일반 시민과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옛 수도인 양곤에서만 최대 10만 명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강제진압을 경고하며 양곤 등에 야간 통금령을 내린 군부는 2개 사단의 무장 병력을 양곤에 이미 배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88년과 같은 유혈 사태의 재발 여부에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동남아 소승불교의 중심지인 미얀마에서 승려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점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군부가 유혈진압에 나설 경우 90%가 불교도인 민중으로부터 엄청난 역풍을 맞게 될 수도 있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중국이 미얀마 군부에 자제 압력을 넣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지난달 15일 휘발유와 경유 등 유류 가격을 최고 500% 인상하면서 이번 사태가 촉발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강압통치로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한다는 군부의 개발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한국식 모델도, 중국이나 베트남식 모델도 미얀마에서는 성공할 수 없음이 입증됐다.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개방성의 확대를 통해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20년 독재에 길들여진 군부는 과연 이 길을 택할 것인가. 그 선택에 따라 미얀마는 완전한 국가실패로 갈 수도 있고,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권위주의적 군부독재에서 민주적 문민통치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일정 기간의 혼란과 불안정은 불가피하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미얀마의 미래를 약속하는 유일한 길임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