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 유럽의 통합 과정 주시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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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라 안에서는 온 국민의 관심이 선거와 돈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데 나라 밖에서는 21세기의 기본방향을 돌려놓을 수 있는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럽이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들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유럽은 중세기 봉건영주체제로부터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따른 주권적 영토국가에 이르기까지, 그 후에 민족국가 및 지역통합에 이르기까지 국제관계의 기본구조를 결정하는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지금 유럽이 하나가 되려는 노력은 미래 세계사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 헌법초안 권력배분 문제 돌출

유럽연합(EU)은 현재 15개국으로 구성돼 있는데 내년 5월까지는 10개국이 추가됨으로써 25개국으로 단일 통합체제를 형성할 계획이다. 유럽은 지난 1년간 확대를 위한 작업을 해왔는데 이제 남은 문제는 유럽연합의 헌법을 제정하는 일이다. 바로 EU의 헌법을 채택하기 위해 이번 주말 브뤼셀에서 유럽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본 칼럼은 유럽정상회의가 열리기 전, 금요일에 작성했는데 이미 폴란드와 스페인은 프랑스와 독일이 주동이 돼 작성한 헌법 초안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스페인과 폴란드 외에도 대국이 아닌 나라들은 모두 헌법 초안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이 초안에 반대하는 이유는 권력배분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인구가 많은 대국들에 더 많은 권한을 주고, 비교적 인구가 적은 나라들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권한을 배분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 초안은 '이중 다수(double majority)'라는 개념을 채택하고 있는데 회원국의 다수에 더해 회원국 전체 인구의 60%가 찬성해야 가결되는 제도를 말한다. 그렇게 되면 독일과 프랑스는 인구가 많으니까 자연히 더 많은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작은 나라들은 이에 반대한다. 더욱이 2000년 니스 정상회담에서 스페인과 폴란드는 이미 유럽연합의 확장과 동시에 더 많은 권한을 약속 받았었는데,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스페인과 폴란드의 주장이다.

원래 유럽통합은 독일.프랑스 화해와 협조를 대전제로 진행돼 왔다. 구체적으로 유럽연합의 금융안정을 위해 '성장과 안정 협정'을 준수해 왔는데 이제 와서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경제를 살리기 위해 '성장과 안정 협정'을 포기하고 적자재정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동안 '성장과 안정 협정'을 지키느라고 긴축재정을 해온 다른 나라들은 베를린과 파리의 협조체제를 강대국의 횡포로 보고 이에 저항할 것이 틀림없다.

장기적으로 경제보다 더욱 심각하게 될 수 있는 문제는 유럽연합의 독자적인 군(軍)을 창설하는 문제다. 유럽연합은 공통된 국방 및 외교정책을 추구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지난주에 영국.프랑스.독일이 베를린에서 협의한 문제가 바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별도로 유럽만의 독자적인 군사기획단을 창설하는 문제였다고 알려졌다. 문제는 미국이 반대하는 데 있다.

*** 긴축.적자재정 싸고 논란 일듯

미국은 지난 50년 동안 유럽의 통합을 지지해 왔다. 그리고 동시에 유럽의 방어를 위한 미국의 역할은 나토를 통해 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앞으로 유럽연합이 나토와는 별도의 군사기구를 설립한다면 미국과 유럽의 관계는 매우 심각한 혼란 속에 빠져들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유럽에서 독자적인 군사력을 꿈꾸는 나라들은 폴란드와 스페인처럼 비교적 작은 나라가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 같은 대국(大國)들이다. 유럽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의 나라들이 미국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고 대국들은 독자적인 역할을 꿈꾸는 상황은 동북아의 미래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본다.

만일 유럽이 확장과 더불어 통합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통합단계에 따라 여러 층의 유럽이 병존하게 될 것같이 보인다. 우리는 유럽의 과정을 예의 주시하면서 우리의 앞날을 생각해야 할 줄 안다.

김경원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