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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결정 뒤에 남는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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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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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서울고등법원이 정부의 의대 증원과 배분 결정의 효력을 중지시켜 달라며 낸 집행정지 신청에 대한 결론을 이번 주 내릴 전망이다. 어떤 쪽으로 결과가 나오든 파장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정부는 그간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고 주장해 왔다. 의사들은 반대만 할 뿐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몰아붙였다. 원점 재논의 주장만 되풀이하며 환자 곁을 떠난 의사들을 보면 정부 주장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런데 왠지 답답하다. 애초에 이런 사태를 불러온 결정이 정말 과학적이었는지에 대해 주장만 있을 뿐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부는 “과학적으로 더 타당한 안을 가져오면 논의해 볼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자기 패는 숨긴 채 상대 패만 까라는 요구다.

의대 증원 집행정지 이번주 결정
정부 패소 땐 의료개혁 좌초 위험
이겨도 의사 복귀 설득 난제 남아

이런 태도에는 ‘행정소송을 제기해도 각하될 것’이란 자신감이 깔려 있다. 실제 1심에서는 의대 교수·전공의·의대생·수험생·학부모 등이 낸 모든 집행정지 신청이 각하됐다. 그런데 항고심 재판부가 덜컥 “진짜 과학적인지 보자”고 나오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우선 주요 의사결정의 근거가 된 회의의 회의록조차 제대로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10일 법원에 47개 자료와 2개 참고자료를 냈다. 의대 증원을 논의한 4개 회의체 중 보건의료정책심의위와 의사인력전문위원회 회의록은 포함됐지만, 의료현안협의체와 의대정원배정위원회는 회의 결과를 정리한 문서와 보도자료만 냈다. 특히 “법적으로 회의록 작성 의무가 없다”라거나 “자유로운 입장 개진을 위해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기로 의사 측과 합의했다”는 설명은 군색하기 짝이 없다. 반면에 의협이 낸 일본의 의사수급분과회 회의록은 정부의 안일한 비밀주의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일본은 40년간 의대 정원을 늘려 오면서 의사들과 협의한 내용을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기록했고, 이를 정부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2000명이라는 규모를 도출한 근거자료도 이미 공개된 세 편의 보고서 말고는 딱히 새로운 것이 없는 듯하다. 이 보고서는 저자들 스스로 “2000명 증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들이다. 다른 자료는 필수·지방 의료 인력 부족을 드러내는 기사나 보도자료, 실태조사 정도다. 이 정도로 “정원만 늘린다고 부족한 분야로 인력이 흘러가지 못할 것”이란 의사들 주장을 압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이런 이유로 법원이 집행정지를 결정한다면 올해 의대 정원 확대는 사실상 무산되고, 의료개혁 동력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예단할 순 없다. 항고심을 맡은 서울고법 행정7부는 “모든 행정행위는 사법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조건이 있다. 행정 행위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권리 침해를 일으켰을 때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제한이 없다면 모든 정부 결정은 법원의 허락을 구한 뒤 집행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법에 정한 절차를 명백히 어긴 경우가 아니라 전문적이고 재량적 판단의 결과라면 법원은 정부 결정을 존중해 왔다.

하지만 정부가 승소한다고 해도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법원 심리 과정에서 정부의 부실한 근거와 준비 과정이 드러난 이상 의사들의 복귀를 설득하기는 더 어려워질 것 같다. 5월 말까지 전공의가 복귀하지 않는다면 내년 전문의는 거의 뽑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의대에선 올해 1학년과 내년 신입생이 6년간 같이 강의를 들어야 한다. 5000명도 감당이 안 되는데 8500명으로 신입생을 늘린 꼴이 된다. 의대 교수들은 휴진이 아니라 사직을 강행할 태세다.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는 병원도 속출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환자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 모든 사태를 헤쳐 나갈 복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