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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시각각

민원인 갑질 대책이 빠뜨린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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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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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용의자의 실명은 원칙적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서다. 예외적으로 흉악범에 한해 2010년부터 신상 공개가 허용됐다. 그것도 경찰 심의위원회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지난 6일 오후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한 의대생 A씨는 실명과 얼굴이 인터넷에 널려 있다. 게시글의 상당수가 출처로 경기도의 모 시청을 지목한다. 수능 만점자였던 A씨와 관련한 이 시청 블로그의 과거 게시글이 사건 이후 급속히 유포됐다. 여기엔 A씨의 사진들과 초·중·고교 관련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밤새 A씨를 욕하는 댓글이 이어졌지만, 글은 삭제되지 않고 계속 복제됐다. 다음 날에야 해당 글의 접속이 차단됐다. 이미 얼굴과 이름이 널리 퍼진 이후였다. 파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실명과 얼굴이 드러나자 SNS 계정이 노출됐고 여자친구 사진까지 공개됐다. 피살자의 가족은 관련 정보 공개로 인한 피해를 호소한다. 시청 관계자는 “밤 10시부터 댓글이 달려 있던데 퇴근 이후여서 다음 날 아침 9시30분쯤에 비공개했다”고 설명했다. 시청 담당자를 찾으려 홈페이지를 들어가니 직원 명단이 ‘김○○’ ‘이○○’로 익명 처리됐다. 기획조정실장과 홍보담당관 등 간부는 물론 부시장까지 이름을 가렸다. 그동안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직원 이름과 담당 업무, 연락처를 투명하게 공개해 왔다.

부시장 이름까지 익명화한 시청

익명 처리의 계기는 지난 3월 김포시 공무원이 도로 공사와 관련한 민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행정안전부가 지난 2일 발표한 대책에는 ‘공무원 개인정보 공개 수준 조정 권고’와 ‘부당한 정보공개 청구는 심의회를 거쳐 종결처리’가 포함됐다. 이상민 장관은 “악성 민원으로부터 민원공무원을 보호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라고 했다. 일부 지자체가 발 빠르게 이름을 가리기 시작했다.

공무원 보호 조치이긴 하나 국민의 알 권리가 위축될 수 있는 내용이다. 정책실명제는 시혜가 아니라 법과 규정에 따른 것이다. 행정업무규정 63조엔 기관장 관리 대상에 ‘주요 정책의 결정과 집행 과정에 참여한 관련자의 소속, 직급 또는 직위, 성명’을 포함한다. 실명제를 후퇴하려면 보완조치가 필요하다.

정보공개 제한도 우려스럽다. 악의적인 청구로 행정력을 낭비하게 하는 사례는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당한 정보공개 청구를 정부가 부당하게 거부하는 행태가 더 큰 문제다. 법정까지 가 패소한 이후에야 정보를 공개하는 사례가 한두 건이 아니다. 행안부가 발표한 2023 정보공개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행정소송으로 이어진 사건의 인용률이 절반(49%)에 이른다. 검찰·경찰과 대통령실 같은 권력 기관일수록 정보공개 거부로 논란을 일으킨다.

'한강 의대생 사망 사건' 고 손정민씨 부친 손현씨에게 CCTV 영상을 제공하라는 내용의 판결문 일부.

'한강 의대생 사망 사건' 고 손정민씨 부친 손현씨에게 CCTV 영상을 제공하라는 내용의 판결문 일부.

2021년 4월 발생한 ‘한강 의대생 사망사건’의 고 손정민씨 부친 손현씨도 사고 추정 장소의 CCTV 영상을 받기 위해 수백만원을 써가며 서울 서초경찰서와 소송을 벌여야 했다. 서울행정법원은 ‘2021년 4월 25일 오전 3시26분부터 오전 5시16분까지의 녹화 영상’을 제공하라고 판결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망이라는 충격적 사실을 접한 원고에게 그 원인에 관한 의문 해소라는 권리 구제를 위해 관련 영상을 파일로 제공할 필요성이 있다’는 결론을 꼭 판결문으로 확인해야 했을까.

시민 정보공개청구 제한에 앞서

무조건 감추는 태도부터 고쳐야

“행정관료들은 개인 혹은 기관 전체의 입장에서 불리한 정보공개가 청구되면 여러 가지 핑계를 들어 정보공개를 거부하려 든다”(이재완·정광호, ‘정보공개청구 수용에 관한 연구’)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정보공개 종합평가에선 13개 기관이 ‘미흡’ 등급을 받았다. 부당한 정보공개 거부에 대한 보완책 없이 제한 조치만 궁리하니 균형을 잃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제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정부”가 되겠다고 했다. 대통령이 아무리 애써도 일선 기관에서 시민을 멀리하고 정보를 감추면 소통 약속은 공염불에 그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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