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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시효 오늘까진데...끝내 소송 못 한 ‘안인득 사건’ 피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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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포항과 진주의 판이한 국가배상소송 지원〉

5년 전인 2019년 4월 17일 새벽 경남 진주에서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다. 안인득(당시 42세)씨가 아파트에 불을 지른 뒤 대피하는 이웃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을 살해하고 17명을 다치게 했다. 세월호 참사 5주기 추모식 다음 날 전해진 비보에 국민은 충격을 받았다.
직후 이웃의 증언을 통해 안씨의 조현병 증세가 뚜렷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에 여러 차례 신고했으나 부실 대응 탓에 참극을 막지 못했다. 가족을 잃은 A씨가 의사와 변호사 등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11월 15일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A씨 가족에게 약 4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법원, 경찰 부실 대응에 “국가가 피해자 가족에게 4억원 배상” 판결
공식 피해자 22명 외 주민 정신적 피해 심각하나 대부분 시기 놓쳐
포항선 시청 등 전방위 홍보전에 지진 피해자 50만 명 소송에 동참
‘치매 보듬 마을’ 주민도 90% 이상 참여…승소 땐 1조원 넘게 배상

다음날인 11월 16일. 이번엔 경북 포항에서 국가가 지진 피해자 4만 7000여 명에게 200만~300만원씩 배상하라는 대구지법 포항지원의 판결이 나왔다. 하루 차이로 진주와 포항에서 국가의 책임을 묻는 판결이 나왔지만, 이후 두 도시에서 전개된 상황은 판이했다.

 지난 1월 포항시 소속 공무원들은 경로당과 어르신 행복쉼터를 다니며 지진 피해 소송을 적극적으로 안내했다. 그 결과 50만 명 이상이 소송에 참여했다. [사진 포항시청]

지난 1월 포항시 소속 공무원들은 경로당과 어르신 행복쉼터를 다니며 지진 피해 소송을 적극적으로 안내했다. 그 결과 50만 명 이상이 소송에 참여했다. [사진 포항시청]

지난 8일 오전 10시쯤 경북 포항의 포항지원 인근 공봉학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공 변호사는 2017년 11월 15일과 2018년 2월 11일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 피해자들의 소송을 주도했다. 그의 사무실엔 10만 명 넘는 포항 시민들이 보내온 소송 관련 서류가 가득했다. 변호사 사무실 공간이 모자라 인근 건물의 사무실 두 곳에도 관련 서류를 보관 중이다.

포항 인구보다 많은 소송 참여자

포항시청이 추산한 소송 참여 시민은 약 50만 2000명에 이른다. 지난달 기준 포항 인구 49만2342명보다 많다. 지진 발생 시점보다 포항 인구가 줄었기 때문이다. “지진 당시 인구의 96% 정도가 소송에 참여했다”고 시청 측은 밝혔다. 시청을 중심으로 지역 국회의원들과 법조인 등 각계에서 독려한 결과다.
이 소송의 시효는 지난달 20일로 끝났다. 정부조사연구단이 지열발전소로 인해 지진이 촉발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날이 2019년 3월 20일이었기 때문이다. 1심 판결 이후 4개월밖에 시간이 없었지만, 총력 홍보전이 먹혔다. 시청 청사에 ‘포항 촉발 지진 2월 말까지 손해배상 소송 참여하세요!’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걸었다. SNS와 방송을 통해 홍보하는 한편 시청 통화연결음으로도 알렸다. 시청 공무원들은 ‘2월 말까지 손해배상소송 참여하세요’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다녔다. 넉 달 만에 50만 명이 소송 서류를 냈다. 이들의 피해가 인정되면 보상액은 1조원이 넘을 전망이다.
포항 일대를 다니던 중 ‘치매 보듬마을’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이 많아 치매 예방 활동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동네라는 설명이다. 이곳 주민도 소송에 참여했을까. 마을이 속한 흥해읍 관계자는 “지난 2월 파악했을 때 해당 마을 주민 177명 중 90% 정도인 약 160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국가 배상 판결이 나온 경남 진주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피해자 가족 상당수가 소송을 안 냈다. 시효는 오히려 진주가 더 길어서 사건 발생일로부터 5년이 되는 16일까지 소송이 가능하다. 그러나 진주시청과 법률구조공단 및 1심 소송을 진행한 ‘법과 치유’ 오지원 변호사 등에게 확인한 결과 소송을 낸 시민은 다섯 가족 정도로 파악됐다. 안씨에게 직접 살해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피해자만 22명이었으니 극히 일부만 참여한 셈이다. 공식 피해자 집계에 빠진 주민 상당수도 후유증이 심각하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눈앞에서 이웃이 흉기에 찔려 숨져가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평생 정신적 상처에 시달린다고 한다. 사건 이후 LH에서 이사비 등을 지원한 피해자 숫자만 78가구에 이른다. 문제는 저소득 고령자가 많은 임대아파트 특성상 피해자 대다수가 법원 판결과 배상 가능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1심 판결 한 달 뒤인 지난해 12월 22일 사고가 난 아파트를 돌아봤으나 배상 판결 및 피해 구제 사실을 알리는 현수막이나 게시물을 찾을 수 없었다.

진주 피해자 일부만 소송 제기

언론에서 국가배상청구권의 소멸 시점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잇따르자 진주시청은 지난달 20일부터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시효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었다. 안씨에게 살해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22명의 가족이 대상이었을 뿐, LH가 지원한 78가구 피해자 등 당시 주민 대다수는 통보 대상에서 제외됐다.
참극이 벌어지기 전 주민 신고에 안이하게 대처한 경찰의 잘못은 명백하다. 이때만 제대로 조치했으면 주민들을 살리고 안씨도 치료가 가능했던 상황이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최근 발간한 책에서 “소송 과정에서 가해자가 된 조현병 환자(안씨)의 의무 기록을 볼 수 있었다. 치료를 받았던 2016년까지 그가 얼마나 호전됐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이 비극의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밝혔다.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
더욱이 진주 사건의 경우 국가가 항소를 포기해 배상 판결이 확정됐다. 피해자가 소송만 제기하면 승소 가능성이 크다.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판결 직후 피해자 가족에게 ‘선생님 가족분들 생각하면 아득하고 죄송스럽습니다’라고 손편지까지 보냈다.

국가 항소 포기에 한동훈 사과 손편지

안인득 사건과 포항 지진 피해자를 모두 진료했던 이영렬 전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장에게 두 사건에 관해 물었다. 이 전 센터장은 포항 시민의 충격이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했다고 설명한다. 450명 정도를 직접 상담한 그는 “첫 지진은 처음 경험한 강진(규모 5.4)이라서 충격이 컸고, 겨우 안정을 찾을 때쯤 두 번째 지진(규모 4.6)이 터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코로나19 사태까지 닥치면서 심리적 공포감이 극심해졌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두 명의 자살 사례를 접한 그는 심리 상담을 진행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사안이 “자살을 막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포항지진 피해자 소송을 주도한 공봉학 변호사와 이영렬 전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장, 안인득 사건의 피해자 소송을 도운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왼쪽부터) 강주안 기자

포항지진 피해자 소송을 주도한 공봉학 변호사와 이영렬 전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장, 안인득 사건의 피해자 소송을 도운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왼쪽부터) 강주안 기자

그가 국립부곡병원장일 때 발생한 진주 사건에 대해선 “주민들의 정신적 충격은 포항 지진 피해자보다 훨씬 심했으며 해당 아파트 거주자 모두가 트라우마를 받았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상담을 할 때 끔찍했던 피 냄새에 대한 기억, 죽어가던 피해자가 피 묻은 손으로 다른 집 벨을 누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모습에 대한 충격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법조계 “무료 변론” 뜻 물거품

절박한 상황에 각계에서 지원 의사를 전해왔다.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최원혁 변호사는 “무료로 피해자 소송을 돕겠다”고 했다. 그러나 시일이 촉박한 데다 피해자들을 접촉할 방법이 없어 시간만 흘렀다. 지난달부터 피해자에게 시효 만료 안내를 시작한 진주시청 측은 “관련 내용을 피해자 22명의 가족에게 알렸고 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도록 안내했다”고 말했다.
트라우마가 심한 피해자들을 법정으로 이끌려면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첫 소송 당사자인 A씨도 의학·법조계·시민단체 전문가들이 꾸준히 지원했다. 그러나 이젠 시간이 없다. 이상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피해자들이 시효가 지나 배상을 못 받게 되는 점은 안타깝지만, 소송해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이 요건이 충족되는 피해자인 것은 맞는지,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확정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지급한다면 정부의 지출 행위는 항상 법률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법치 행정의 원칙과 안 맞을 수 있다”면서 “현 시스템에서는 공무원이나 법률구조공단이 도와주거나 시민단체가 나서는 정도이며,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도 가능한 방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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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붕괴된 피해자 보호 미흡해”

'법과 치유' 오지원 변호사.

'법과 치유' 오지원 변호사.

안인득씨 사건 피해자 A 씨의 소송을 이끈 오지원 변호사(사진)는 15일 “범죄피해자 보호법에 중요한 권리들이 빠져 있어 벌어지는 문제”라고 말했다.
-1심 승소 이후 추가로 도움을 요청한 피해자가 있나.
“한 가족 다섯 명이 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피해자는 더 많지 않나.
“공식 피해자 22명의 가족만 해도 훨씬 많을 거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나.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피해자 법률지원 등이 여전히 부족하다. 가령 일본은 재난 피해자에 대해 민·형사는 물론 행정·이혼 사건까지 법률 지원을 해준다. 이런 피해로 일상이 붕괴하기 때문이다.”
-16일에라도 소송 의뢰가 가능한가.
“쉽지는 않겠으나 관련 서류는 저희가 갖고 있으니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떼 오신다면 노력은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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