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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연쇄살인범의 앳된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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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20세기 기자의 최대 고역은 ‘얼굴 사진 구하기’였다. 흉악범 사진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준법과 탈법의 경계선을 타는 일도 벌어졌다. 한번은 남편이 보낸 킬러에 살해당한 피해자의 사진을 확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상가에 찾아가 유족을 위로한 뒤 간절하게 애원해 주민등록증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행여 마음이 변할까 빠른 걸음으로 장례식장을 나서는데 낯익은 경쟁사 기자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 아닌가.
 “구했죠?”
 낭패감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 그에게 차마 거짓말을 못 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를 붙들고 간청한다. 옆에 선 사진기자가 찍을 수 있도록 주민증을 보여줬다. “꼭 단독 기사로 보도해야 한다”는 선배 지시를 어긴 셈이지만, 한발 늦은 기자의 참담함을 알기에 거절을 못 했다.
 유치원생이 유괴당했을 땐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사진을 입수해야 했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2000년대 들어 피의자 인권이 강조되면서 기자의 고생도 끝난 줄 알았다. 악몽이 되살아난 건 2019년 화성연쇄살인 사건 범인이 밝혀지면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모티브가 된 희대의 살인범이 법무부 보호를 받는 건물에 은신해온 사실만큼이나 황당했던 건 언론에 나온 그의 얼굴이다. 고교 졸업 앨범 사진. 환갑이 다된 이춘재 기사에 교복 입은 청소년이 붙어 다닌다.

 최근엔 택시 기사와 동거녀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이기영의 신상 공개 사진이 실물과 영 다르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강력범죄처벌법에 따라 신상 공개를 결정했지만, 범죄자 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현재 모습과 판이하더라도 신분증 사진을 내보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21세기에도 민간 섹터의 범죄자 사진 찾기는 계속된다.

신상공개 강력범 옛날 얼굴 공개

 국가도 사람의 얼굴은 금세 바뀐다는 사실을 잘 안다. 신상이 공개된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에게 1년마다 최근 사진을 올리라고 한다. 헌법재판소 역시 이 조항에 대해 2015년 합헌 결정을 하면서 “외모는 다른 신상정보에 비해 쉽게 변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범죄자는 얼굴이 쉽게 바뀔 수 있으니 매년 새 사진을 제출해야 하고 어떤 살인자는 30년 전 앳된 사진 뒤에 숨는다. 신상 공개 제도의 일관성 결여가 빚어낸 현상이다.

유영철 같은 끔찍한 살인범조차 얼굴을 감춰주는 변화에 반감이 커지자 2010년 강력범에 대한 신상공개가 시작됐다. 한데 제도의 약점을 아는 범죄자가 재주껏 감추면 최근 얼굴을 알 수가 없다.
 경찰이 심의위원회를 거쳐 신상 공개를 결정해도 현재 얼굴과 동떨어진 모습이 공개되는 사례가 빈발하면서 공은 다시 네티즌 수사대와 언론에 넘어갔다. SNS를 뒤지고 지인을 수소문한다.

네티즌 나서 군복샷·교복샷 올려

이 과정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옷이 군복이다. 남자들은 대개 군 복무 시절 찍은 사진을 몇장씩 갖고 있다. SNS에도 올린다. 이기영은 부사관 시절 정복을 입은 모습이 인터넷에 퍼졌고 이춘재는 탱크 앞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교복도 흔하다. 아직도 얼굴이 명확히 공개된 적 없는 유영철은 중학교 졸업 앨범 사진이 돌아다닌다. 우스꽝스러운 강력범 ‘군복샷’ ‘교복샷’은 연쇄살인범뿐 아니라 강도와 폭력배조차 수사기관이 찍은 ‘머그샷’을 공개하는 미국과 대비된다. 미주리주에선 매춘 업소에 갔다가 단속된 남성의 사진을 공개해 논란이 됐으나 정당한 행위라는 법원 판결이 나온 사례도 있다. (이상현 ‘체포된 형사 피의자의 초상권의 제한된 보호범위: 미국법과의 비교 분석’)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 이춘재. [뉴시스]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 이춘재. [뉴시스]

 학계의 견해는 엇갈린다. 성중탁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신상공개에 문제가 많다는 입장이다. “얼굴을 공개한다고 공익적 효과가 큰 것도 아닌데 가족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다. “얼굴이 다르면 다른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한다.
 제대로 공개하라는 주문도 나온다. “인권 이슈가 있는 걸 알면서도 공공의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해 도입한 제도인데 피의자에 따라 차이가 생기면 안 된다”는 지은석 전북대 로스쿨 교수가 대표적이다.

공개 대상 줄이되 제대로 알려야 

 현행 방식에 문제가 많아서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진단엔 대부분 동의한다. 하주용 인하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의 “적용 대상을 더 엄격히 제한하되 최근 모습을 공개하는 게 필요하다”는 제안에 수긍이 간다.
신상 공개의 대상은 또 늘었다. 지난 12일 법무부가 새로운 인물군을 추가했다.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끊고 도주한 자다.
 범죄 예방을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 늘려야 하겠지만 이쯤에서 한 번쯤 일관성 있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하면 온-오프를 다니며 정보를 찾는 사람들로 인해 인권 보호는 더 버겁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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