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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발 '전력대란' 덮치는데…한국은 신재생·원전 싸움만 한다 [글로벌 에너지 대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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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경기 수원시 영통구 한국전력공사 경기지역본부 전력관리처 계통운영센터에서 관계자들이 전력 수급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8월 경기 수원시 영통구 한국전력공사 경기지역본부 전력관리처 계통운영센터에서 관계자들이 전력 수급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중앙포토

반도체·인공지능(AI) 전쟁이 글로벌 에너지 대란으로 번지고 있다. 생성형 AI 기술 발달로 반도체 수요와 데이터센터 사용량이 급증해서다. 17일 산업계에 따르면 전 세계 각국과 주요 기업들은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에 대규모 투자를 병행하며 ‘무탄소’ 에너지원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TSMC는 재생에너지 큰 손, 빅테크는 원전 투자

지난달 22일 대만 경제부(MOEA)는 전기 요금을 평균 11%, 산업용 요금은 사용량에 따라 최대 25% 인상한다고 밝혔다. 국영 대만전력공사의 누적 적자가 지난해 말 3826억 대만 달러(약 16조원)를 넘자 내린 조치다. 25% 인상에 해당하는 기업은 24시간 반도체 팹을 돌리는 TSMC뿐이다. 현지 언론들은 TSMC 연간 전기요금이 40억 대만달러(약 1682억원) 추가될 것으로 봤다.

대만 민진당 정부가 지난 2016년 ‘2025년까지 탈원전’을 선언한 후, TSMC는 전력 확보 및 효율화에 사활을 걸었다. 재생 에너지 100% 사용 캠페인인 ‘RE100’ 주관사 클라이밋그룹과 CDP(탄소정보공개 프로젝트)가 지난달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TSMC는 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자로부터 전력을 직접 구매하는 물리적 PPA 기준 세계 5위 기업이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전력 확보가 중요한 빅테크 기업들은 원전에 눈을 돌리고 있다. 세계 클라우드 시장 1위인 아마존은 지난달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위치한 데이터센터를 6억5000만 달러(약 8700억원)에 인수했는데, 이곳은 인근 원전에서 100% 전력을 수급하며 향후 10년간 전력 공급 계약도 맺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는 세계 최대 재생에너지 구매 업체인 아마존이 원전과 맺은 첫 계약이다. 아마존은 204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제로(0)로 만들겠다는 넷제로 선언을 했고 이미 RE100 회원사다. 그럼에도 원전을 에너지원으로 추가한 것. 아마존은 FT에 “풍력·태양광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무탄소 청정 에너지원에 투자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MS)도 지난달 첨단 원자력과 차세대 지열 등의 공동 개발·상용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구글은 24시간 연중무휴 탈탄소 전력으로만 운영하겠다고 지난 2018년 선언했는데, 이를 달성하려면 원자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한국, 해묵은 탈원전 논란 벗어야

국내에서도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의 전력 수급에 대한 문제 의식은 있다. 이번 총선 공약으로 국민의 힘은 ‘원전 활용 및 차세대 소형모듈원전(SMR) 기술 개발 추진’을, 더불어민주당은 해안선을 따라 ‘전국 U자 형태의 RE100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내세웠다.

지난 1월 분주하게 공사가 진행 중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용인반도체클러스터 부지 모습. 연합뉴스

지난 1월 분주하게 공사가 진행 중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용인반도체클러스터 부지 모습. 연합뉴스

다만 해묵은 에너지 이념 논쟁에 갇혀 있다. 반도체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네덜란드 ASML이 지난 2월 연례보고서에서 ‘넷제로 2040’ 목표를 밝히자, 일부 국내 언론이 ‘ASML이 탈원전 선언했다’라고 보도했고 일각에서는 ‘삼성·SK하이닉스가 RE100을 달성하지 않으면 ASML이 장비를 안 준다’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지난 2일 한국원자력학회는 ASML에 직접 문의한 후 ‘ASML은 탈원전을 선언한 적 없다’라는 보도자료를 냈다. ASML은 연례보고서에서 “다른 해법이 가능하지 않다면 녹색 재생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자사의 원칙을 밝혔을 뿐 ‘원전’이나 ‘RE100’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

RE100과 원자력, ‘넷제로’ 목표의 수단일 뿐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 1월 발간한 ‘전력 2024’ 보고서에서 내년엔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석탄 연료를 추월하고 원자력 발전량도 최고치를 경신할 것으로 내다봤다. 넷제로 목표와 전력 수요를 모두 충족하기 위해,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이 모두 증가할 거라는 분석이다. 특히 IEA는 2050년 원자력 발전이 현재의 2배가 될 거라고 봤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국제 사회도 원자력을 넷제로 수단으로 인정하는 추세다. 지난해 12월 UN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는 원자력과 수소에너지도 ‘탈탄소’ 수단에 넣기로 합의했다. 지난 2월 유럽연합(EU) 역시 기후중립산업법(NZIA) 최종 합의안에서 탄소중립 기술에 원자력을 조건부로 포함했다. 대한상공회의소 그린에너지실 임은정 과장은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지정학적 위기 때문에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원자력을 늘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대만도 전력 고민

전 세계 반도체 제조 기지의 쌍벽인 한국과 대만은 국토가 좁고 인구밀도는 높아 재생 에너지 수급에 불리하다. 대만은 2050년까지 재생 에너지 비율을 20%로 올리겠다는 기존 목표를 지난 2022년 15%로 하향 조정했다. 전력난도 심각하다. 지난달 미국 씽크탱크 제임스타운이 “TSMC가 일본 구마모토에 반도체 공장을 지은 배경에는 대만의 전력 부족도 있다”라고 분석할 정도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한국·대만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많은 건, 수출 비중이 높은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이라며 “제조업 국가의 에너지 정책은 달라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한국 역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서 전력 공급이 최대 난관으로 꼽힌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30년부터 가동할 용인 반도체 팹 일정에 맞춰 일단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를 짓고, 장기적으로는 호남의 태양광이나 동해안 원전에서 전력을 수급할 수 있도록 장거리 송전선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재생 에너지 전환율은 각각 31%와 30%로 TSMC(10%)보다 높으며, 미국·중국 등 해외 사업장에서는 이미 100% 전환을 달성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낮은 일조량과 영세한 사업 구조 때문에 태양광 등 재생 에너지만으로는 반도체 공정에 적합한 일정 전압·주파수 전력을 대량 확보하기 어려워 재생에너지 인증서(REC) 구매로 대체하는 실정이다.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기업 테라파워의 에버렛연구소에서 연구소 직원들이 소듐냉각재 시설의 작동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테라파워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기업 테라파워의 에버렛연구소에서 연구소 직원들이 소듐냉각재 시설의 작동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테라파워

한국은 지진이 잦은 대만·일본에 비해 원전 가동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만큼, 정치적 고려보다 현실적인 대책을 세우고 차세대 소형모듈원전(SMR) 기술을 선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SMR은 기존 원전보다 입지 구하기가 쉽고 안전해, 데이터센터용 전력 공급에 알맞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성민 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는 “혁신형 SMR 기술에 투자해, 원전 이후 또 하나의 수출 아이템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글로벌 에너지 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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