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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뜨거운 감자 '비동의간음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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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요즘은 모든 일에 동의가 필수다. 가령 인터넷 결재를 하거나 회원 가입을 할 때도 늘 ‘동의하는지’를 묻는다. ‘동의’란에 체크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진행되지 않는다. ‘동의’란 곧 ‘책임’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에도 여러 번 인터넷에서 동의하면서도 막상 책임 있는 성관계에 대한 동의란 얘기를 꺼내면 태도가 달라진다.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처벌하는 ‘비동의간음죄’ 도입 여부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지난달 여가부가 강간죄 성립 요건을 ‘폭행·협박’ 아닌 ‘동의’ 여부로 판단하는 비동의간음죄 도입을 검토한다고 발표했다가 반나절 만에 철회했는데, 그 후폭풍이 거세다. 한쪽에선 성관계할 때마다 동의서라도 쓰란 말이냐, 남녀가 제대로 사랑하기도 어렵다, 실컷 동의해 놓고 나중에 변심하면 어쩌냐고 부글부글 들끓는다. 다른 한쪽에선 도대체 동의 없는 성관계가 범죄 아니면 무엇이냐고 묻는다. 팽팽한 평행선이다.
 비동의간음죄 도입은 여성계의 숙원사항이었다. 폭행과 협박, 그것도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만 강간죄로 보는 현행법 대신 성적 자기결정권에 입각한 동의 여부가 강간을 가르는 기준이 돼야 한다는 논의가 뜨거웠다. 지난 20대 국회에선 관련 법안 발의에 현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까지 동참했다. 우리 법원은 2018년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여비서 성폭행 사건 때 폭행·협박 없이도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인정하기도 했다(업무 관계가 아닌 경우는 여전히 처벌이 어려웠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19년 1~3월 전국 성폭력상담소 66곳에 접수된 강간 피해 사례 중  ‘직접적 폭행·협박 없는 성폭력’은 71.4%에 달했다. 무방비 상태거나 금전적 이유로 가해자에게 의존하거나 종교 지도자와 신도처럼 가해자가 권력의 위치에 있는 경우 등 다양했다.
 해외에선 비동의강간죄가 국제 기준으로 자리 잡는 추세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영국·독일·오스트리아·스웨덴·스페인 등 10개국이 넘는 유럽 국가와 캐나다·호주·미국 일부 주에 도입됐다. 일부의 우려처럼 피해자 진술만으로 유죄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가령 영국에서는 상대방에게 동의 능력이 있었는지, 동의할 자유가 있었는지, 가해자가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등을 기준으로 강간죄를 판단한다. 최근에는 일본도 형법을 개정해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비동의 의사 표명이 곤란한 상태에서의 성행위는 강간죄로 인정키로 했다.
 지난 8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비동의간음죄가 도입되면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고” “(검사가 아닌) 피고인에게 100% 입증 책임이 돌아갈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비동의간음죄는 “성범죄 유죄율이 우리보다 낮은 독일과 스웨덴에서 국민 공분을 해소하자는 취지에서 신설된 법”이라고도 강조했다. 단, 한 장관은 “동의 없는 성관계는 당연히 범죄”고 비동의간음죄 도입이 "세계적인 방향"이라는 데는 동의했다.
 그런데 한 장관의 발언 중 우리나라 성범죄 유죄율이 높다는 부분은 여성들이 체감하는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낮은 신고율, 낮은 기소율 등 사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성폭력 피해들이 많은 한국적 현실 말이다. 여가부의 '2022년 여성폭력통계'에 따르면 2020년 성폭력범죄 피의자의 기소율은 49.2%로 절반 가량만 재판에 넘겨졌다. 이날 질의자로 나선 류호정 정의당 의원 역시 “대한민국에선 성범죄 피해자라는 낙인, 가해자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등 성범죄 고소에 큰 용기가 필요하다”며 “성범죄 처벌률이 (높다지만 다른 나라와 현실이) 다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논란이 큰 만큼 신중할 필요는 있다. 과잉입법이나 무고의 가능성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한 처벌의 공백, 폭행·협박이 없으면 동의한 셈이 되는 불합리를 어찌해야 할까. 무고의 가능성은 성범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정부의 정책 철회에도 더 많은 사회적 논의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여가부 검토 철회에도 여진 계속 #세계적 추세…일본도 형법 개정 #찬반양론, 적극적 논쟁 이어가야